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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36도 폭염에도 긴 바지· 등산화· 물도 못 마셔… 우리는 가스검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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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매달리고 나무 타며 ‘뻘뻘’

8시간 땡볕서 하루 500세대 검침

마스크 쓰고 긴팔·등산화 중무장

서울시 격월검침 지침 마련에도

사측 요금민원 탓 현장검침 요구

“자율 아닌 의무 시행해야” 목소리

세계일보

지난달 27일 서울도시가스 위탁업체 소속 검침원 김모(53)씨가 담장 너머 보이는 한 다세대주택의 계량기를 검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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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이렇게 다니다 보면 속이 메스꺼워져요. 토할 것 같은 적도 많아요.”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36도까지 올라갔던 지난달 27일. 서울 은평구의 한 골목길에서 만난 서울도시가스 위탁업체 소속 검침원 김모(53)씨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김씨는 이 일대를 10년 가까이 담당한 ‘베테랑’이지만, 매년 여름은 힘에 부친다. 한낮 불볕더위에 마스크를 쓴 채 그늘 한 점 없는 골목길을 걷고 있자니 언덕이나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턱턱 막혔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해 실내로 들어갔지만, 김씨는 이날 오전 8시부터 8시간 가까이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금세 갈증이 날 만한 날씨지만 그는 물조차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화장실 가기가 어려우니 물을 잘 못 마셔요.” 길게 이어진 언덕을 보는 김씨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김씨가 맡은 지역은 비탈길에 있는 다세대주택이 많아 계량기를 찾는 것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씨는 건물과 담 사이 좁은 틈으로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는가 하면, 마당 문이 잠긴 빌라의 계량기를 보기 위해 담벼락에 매달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온몸이 긁히는 일이 많다 보니 폭염에도 반팔·반바지는 꿈도 못 꾼다. 신발 역시 두꺼운 등산화만 신는다. 이날 땀을 뻘뻘 흘리며 500여 세대의 계량기 검침을 마친 김씨는 “한여름에는 망원경이나 휴대용 단말기(PDA) 같은 가벼운 짐들도 납덩이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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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많은 도시가스 검침원이 ‘폭염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업무 특성상 하루종일 야외에서 도보로 이동하며 일을 해야 하는 검침원들에게 여름 무더위는 건강까지 위협할 정도다.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여름에는 검침 업무를 줄이는 지침을 마련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도시가스 검침원 A(54)씨에게 여름은 두려움 자체다. 그는 ‘역대 최악의 폭염’이라 불리는 2018년 7월 계량기 검침 업무 중 일사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A씨는 “요즘에도 더운 날 검침 업무를 하다 보면 어지럽고 현기증이 날 때가 있다”며 “3년 전처럼 또 쓰러질까 봐 늘 불안하다. 밤에는 두통약을 먹고 잠든다”고 털어놨다. 검침원 B(51)씨도 “땀을 많이 흘리다 보니 매년 여름마다 땀띠나 습진 같은 피부질환으로 고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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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여름 ‘격월검침’ 지침을 마련했다. 통상 매달 하는 검침을 6∼9월에는 두 달에 한번 실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의무규정이 아니어서 지침을 지키지 않는 곳도 많다. 지침을 지키는 곳도 한창 폭염이 절정인 7월이 아닌 8월 이후에만 격월검침을 하도록 하거나, 검침 실적을 압박해 사실상 검침 업무를 계속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A씨는 “회사가 격월검침 지침을 내려놓고도 실적에 반영할 테니 검침을 할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하라고 말한다”며 “눈치가 보여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침원도 “여름에는 도시가스 사용량이 적어서 매달 검침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야외 검침을 하지 않아도 민원 응대, 고지서 관련 업무 등 할 일이 많다“며 “최소한 한여름인 7월 중순∼8월 중순까지는 야외 업무를 줄여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윤종희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서울지부 조직부장은 “격월검침 지침이 있지만 회사에서는 민원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현장 검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검침원들이 압박을 받지 않게 의무적으로 격월검침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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