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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성적 수치심과 젠더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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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형법의 체계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로 작용한다. 형법 제22장 ‘성풍속에 관한 죄’에서는 음란물이나 음란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어 음란성을 따지는 기준으로 쓰이고,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에서는 추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의 설명을 보면, 성폭력에 관한 죄의 규정은 개인적 법익인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럼 성적 수치심의 유무는 일반인과 피해자 본인 중 누구의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대법원은 추행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의 감정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그런데 판례대로라면 성폭력의 경우 문제의 가해행위에 대해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면 이론적으로 그 가해행위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가해행위에 수치심이나 혐오감이 아닌 감정, 예를 들어 공포나 분노를 느낀다면 어쩔 것인가. 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범죄구성요건으로 작용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폭력범의 성격을 가진 강제추행죄 등에 성적 수치심 유무라는 기준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가해행위가 수치심을 일으키겠는지를 피해자 본인의 관점에서 따지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수치스러웠느냐고 묻는다면 난센스가 아닐까. 누구든 그런 일을 당하면 우선 놀라면서 성이 날 것이고 역겨움, 굴욕감, 무서움, 무기력함도 느낄 수 있다. 여성들이 쓰는 시쳇말 ‘성적 빡치심’은 분노와 함께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다.

성범죄서 수치심 유무 따지는 건
법의 영역서 젠더규범으로 작용
용어 변경 법 개정안 요지부동
결국 입법·재판서 필요한 것은
젠더권력에 대한 근본적 반성

성적 수치심 유무를 피해자를 기준으로 따지려는 경우에 생기는 문제의 심각성은 이 요건의 충족 여부가 범죄 성립을 좌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14조 제1항은 카메라 등을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를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법문대로라면 여기에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 부위인지 아닌지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촬영대상자의 관점에서는 촬영이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면 될 것이다. 몇몇 대법원 판결도 이런 해석론에 서 있다. 그런데도 종종 법원은 촬영행위로 피해자 본인이 수치심을 느꼈는지 아닌지를 따져서, 여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의정부지방법원은 2019년 버스 내에서 여성의 신체부위를 촬영한 행위가 문제된 이른바 ‘레깅스 몰카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유 중 하나인즉 “피해자의 진술이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표시한 것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2020년에 피해자의 진술이 분노와 수치심의 표현이라 하여 수치심을 넓게 해석하면서 의정부지법의 판결을 파기했다. 결론은 타당하지만, 왜 굳이 피해자의 수치심을 따지자는 것인지 이 점 수긍하기 어렵다.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지금처럼 바뀐 것은 1996년이다. 여성의 성적 순결을 뜻하는 ‘정조(貞操)’라는 용어부터 이미 남성 중심적 시각을 보여준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그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에서 수치심이 자신의 완벽함을 기대하지만 연약하고 무력하다는 판단을 내포한다고 분석한다. 성범죄의 피해자라면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규범적 요구는 올바르지 않다. 왜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잘못된 것은 폭력이지 제 몸을 지키지 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성폭력범죄를 다룬 피해자 진술조서를 읽다 보면, 때로 민망할 정도로 ‘피해자다운 수치심’을 찾아내려는 의도가 곳곳에 보인다.

성폭력범죄에서 피해 감정 중 하필 수치심 유무를 따지려는 인식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성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의 근원은 여성을 성의 주체로 보기보다는 욕망의 객체로 보는 인식, 즉 대상화(對象化)에 있다. 이런 인식이 아직도 법의 영역에서 젠더화된 규범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성폭력처벌법상의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자는 내용의 개정안은 이미 2018년부터 발의됐지만 법이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입법에서든, 재판에서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인식 전환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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