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8 (목)

"으하, 동메달" 여홍철은 딸 앞에서 목이 메었다 [Tokyo 202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여서정이 1일 오후 일본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도마 결승전에서 점프한 뒤 착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5년 전, ‘여’가 출발대에 섰다. 짧게 깎은 군인 머리에 긴장한 표정으로 로진이 잔뜩 묻은 손에 침을 뱉었다.

25년 뒤 또 다른 ‘여’가 출발대에 섰다. 묶어 올린 머리에 표정이 담담했다. 오른손을 들어올린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1996년의 ‘여’와 2021년의 ‘여’가 겹치는, 25년의 시간을 넘는 데자뷔.

기계체조 도마는 올림픽 모든 종목 중 가장 짧은 순간을 겨루는 종목이다. 남자 육상 100m도 10초 가까이 걸리고, 역도도 인상과 용상이 각각 3차시기 씩이다. 도마는 도움닫기 포함 4초 안에 끝나는 승부다. 기회는 2번 뿐. 8초가 채 안되는 시간으로 순위와 메달이 갈린다. 그 8초를 위해 ‘여 이대(二代)’는 수년 동안 뛰고 또 뛰고 날아 올랐다. 여서정은 “짧지만 주변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종목”이라고 도마의 매력을 밝혔다.

운명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를 이었다. 어머니 김채은씨도 아시안게임 체조 메달리스트다. 부모는 베란다에 평균대를 놓았다. 여서정은 “어릴 때부터 가만히 있는 걸 못했다”고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여홍철은 세계최고였다. 그때 기술 ‘여2’는 앞짚고 뛰어 두바퀴 반을 비튼다. 아버지를 따라 여서정도 고유기술 ‘여서정’을 가졌다. 아버지와 똑같은데 반바퀴 덜 비틀어 내린다. 여홍철은 뒤로 돌아 착지, 여서정은 앞을 보고 착지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여서정은 예선을 5위로 통과했다. 1위 시몬 바일스(미국)가 심리적 압박 때문에 기권을 해 결승 선수 중 4위가 됐다. 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에서는 예선에서 아껴뒀던 기술 ‘여서정’을 준비했다. 스타트 점수 6.2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술이다. 결승 8명 중 가장 높다.

경향신문

여서정의 아버지 여홍철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남자 도마에 출전해 도약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 여서정은 “지금의 나보다 도약도, 높이도 훨씬 잘했다”고 했다. 25년전, 힘껏 날아오른 여홍철은 착지 순간 뒤로 크게 밀렸다. 메달 색깔이 바뀌는 걸 직감한 여홍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서정은 3년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 “아버지가 못 딴 금메달 따서 꼭 목에 걸어드리고 싶다”며 울먹였다.

여서정이 입을 꽉 다문채 달리기 시작했다. 1차시기 ‘여서정’이었다. 힘차게 구른 뒤 앞짚고, 25년전 아버지처럼, 몸을 띄워올렸다. 손을 모아 비튼 뒤 두 발로 내렸다. 25년전 그때와 달리 여서정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광판에 점수 15.333이 떴다. 마이크 앞에 선 아버지는 “아아아 서정아, 너무 잘했어요. 착지도 너무 완벽했어요” 라고 외쳤다.

2차시기에서 난도 5.4짜리 기술을 안정적으로 펼쳤고, 착지에서 외발로 두 걸음 물러섰지만 여서정은 연기를 마친 뒤 기쁜 표정으로 이정식 코치에게 달려가 안겼다. 여서정은 2차시기 14.133을 받아 합계 14.733을 기록했다. 충분히 대단한 기록이었다.

3년 전 아빠의 목에 걸겠다는 ‘금’은 아니었지만 레베카 안드라지(15.083·브라질), 미카일라 스키너(14.916·미국)에 이어 한국 체조 여자 올림픽 사상 첫 메달리스트가 됐다. 아버지는 “아아아 동메달, 하하하하. 네, 잘했습니다”라고, 목놓아 외쳤다. 자신의 은메달 때 실망했던 아버지는 딸의 동메달에 목이 메었다.

도쿄|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 [뉴스레터] 식생활 정보, 끼니로그에서 받아보세요!
▶ 경향신문 프리미엄 유료 콘텐츠가 한 달간 무료~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