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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버림받은 공주의 눈물…달빛 왕관으로 빚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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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수경 개인전 전경. [사진 제공 =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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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 이수경(58)과 제인 진 카이젠(41)은 오래전부터 바리데기 신화에 관심을 가져왔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공주가 병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사후 세계까지 갔다가 돌아온 후 왕국의 절반을 상속받는 대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무당이 된 이야기다. 두 작가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바리데기 공주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에 펼쳤다.

이수경은 바리데기 공주의 금빛 눈물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은 조각 '달빛왕관-바리의 눈물'을 선보였다. 바리데기 머리 위는 상승곡선으로 자개를 장식하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을 형상화한 수정을 꼭대기에 올렸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도 성차별이 여전하지만 여성의 저력과 치유 능력 또한 변함없기에 바리데기 공주를 작품에 자주 등장시킨다. 그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모든 걸 쏟아부은 후 '달빛 왕관' 연작을 제작하면서 심신을 추스렸다고 한다. 권력의 상징 왕관이 아니라 내면의 신성(神聖)을 발견하게 해준 왕관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우리 안에도 신성이 있다. 작품의 기운과 소통하면서 내 자신이 왕관처럼 빛난다는 것을 느끼길 바란다. 코로나19 공포에 시달렸을 때 이 작업에 집중하면서 활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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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진 카이젠 개인전 전경 [사진 제공 = 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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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과 백제 금동대향로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왕관을 머리 위가 아닌 받침대에 뒀다. 기존 왕관이 신의 세계와 소통하는 상징적 대체물이었다면, 이수경의 왕관 작품은 개인 내면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이 남성적 권력을 상징한다면, 달빛은 가려진 이면,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며 "동서양의 다양한 종교적 상징을 혼합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전시작 11점에서 천사, 기도하는 손, 십자가, 용, 식물, 만화 주인공과 요술봉이 드러난다.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에 입양돼 자란 카이젠은 숙명적으로 바리데기 신화에 끌렸다. 고향 제주를 토대로 상실과 회복, 치유를 담은 72분 길이 영상 설치 작업 '이별의 공동체'를 세 개 스크린에 펼친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상영했던 이 작품명은 시인 김혜순의 '여성, 시하다' 한 구절에서 발췌했다. 첫 번째 화면에서는 겨울 제주 오름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회전하는 작가의 모습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두 번째 영상은 검은 용암석과 짙푸른 제주 바다 풍경, 마지막 영상은 제주 4·3사건 생존자인 무당 고순안이 굿을 준비하는 장면이 흐른다. 작가가 5년에 걸쳐 비무장지대(DMZ), 제주도, 서울, 북한, 일본, 중국, 카자흐스탄, 독일, 미국 등에서 만난 여성들이 거쳐온 여러 공간과 시간, 목소리가 위계 없이 얽혀 등장한다. 카이젠은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파장, 젠더 차별과 사회적 소외가 어떻게 전쟁과 이주의 상황과 맞물려 부서진 공동체를 만들었는지를 탐구했다. 카이젠이 거스톤 손틴-퀑과 협업한 '달의 당김'은 바닷가 용암석 위에 황동 그릇, 과일, 쌀 등 제주 해녀들의 제물과 하얀 명실 가닥을 올려놓고 촬영했다. 이 명실은 맞은편 영상 작품 '땋기와 고치기'에서 머리카락 매듭으로 연결된다. 장수를 상징하는 흰 실타래처럼 서로의 머리를 땋아주는 여성들은 위로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두 작가 전시는 9월 26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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