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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양심적으로, 마약했습니다" 고백한 그는 왜 무죄를 주장했나 [판결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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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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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마약인 필로폰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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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514호 법정은 한 남성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양심적으로, 마약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수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필로폰을 투약해 현행범으로 체포된 김모씨(46)는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후 진술에 앞서 김씨의 국선변호인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말했다.

사건은 지난 1월15일 오후 4시쯤 벌어졌다. 이틀 전부터 서울 종로구의 한 숙박시설에 투숙 중이던 김씨는 이날 파출소 소속 경찰관과 마주했다. 업주는 “8만원 내고 이틀 전 투숙했는데, 추가 투숙비를 달라고 하자 화장지를 주면서 돈이라 하는 등 이상한 말을 한다”며 신고한 것이다.

출동한 경찰관은 객실을 찾아 직접 김씨와 이야기했다. 김씨는 눈을 뒤집으며 흰자를 보였고 정상적인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관은 종로경찰서 마약전담팀 출동을 요청했다. 현장에 도착한 형사들은 주사 자국이 난 것처럼 보이는 김씨의 팔뚝을 보고 객실 안을 수색해 피 묻은 일회용 주사기 등을 찾아냈다. 흰색 가루 비닐 봉지도 발견했다. 형사들은 김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분명해 보이는 이 사건에서 김씨가 무죄를 주장한 것은 자신에 대한 수사가 위법하게 이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에 필로폰 투약 소지를 의심할 정황이 없는데도 영장 없이 강제로 객실에 침입해 수색했고, 그 사유를 제대로 고지하지도 않아 위법한 수색이니 압수한 주사기나 마약도 증거능력이 없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형사사건에선 증거능력을 인정 받아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증거능력이 인정되면 법관이 자유판단에 따라 그 증명력을 평가한다.

체포 과정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현행범은 누구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지만, 범죄를 저질렀음이 명백하고 체포할 필요성이 있으며 도망의 염려가 있는지 등으로 판단해야 한다. 김씨는 또 경찰이 체포 사유와 변호인선임권, 진술거부권 등을 고지해야 하는 ‘미란다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법정에선 김씨 체포 당시의 ‘바디캠(경찰관이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으로 촬영된 영상이 증거로 제출돼 상영됐다. 김씨와 경찰관들이 고성이나 욕설을 주고 받는 등 소란스런 모습이 담겼다. 김씨 측 변호인은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는지 영상에 정확히 나오지 않았고, 경찰관의 추측만으로 혐의가 소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이 이뤄져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의 능력이 없고, 현행범 체포도 적법하지 않으니 마약 투약 증거는 오직 그의 자백 뿐이라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310조는 “피고인의 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의 증거인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변호인은 “자백을 보강하는 증거가 없다”면서도 “다만 견해를 달리하더라도 최대한 선처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부끄럽고 뻔뻔한 말일 수 있지만 전과로 판단하지 않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변호인 최후변론이 끝나자 피고인석에서 일어서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곧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눈에 흰자 보인다는 걸로 마약을 했다는 게 얼토당토하지 않습니다. 부잣집 아들내미나 가족이 빵빵했으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처벌받은) 경험이 있으니까 이렇지 경험 없는 사람은 경찰서 가면 무지막지하게 당합니다.” 김씨는 한바탕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더니 검사를 향해서 소리쳤다. “어떤 검사님이 쓴 책도 봤는데 ‘법이 공정하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뉴스에 보니까 ○○그룹 회장 아들인가는 (마약 투약해도) 그냥 놔두다가 시끄러우니까 자기가 ‘구속되겠다’ 하고, 그런거 보면 안 부끄럽습니까!”

이 같은 ‘호소’에도 서울중앙지법 형사24단독 박설아 판사는 지난달 22일 김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마약 투약을 상당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으므로 긴급하게 영장 없이 수색한 경우에 해당하고 현행범 체포 요건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숙박업주의 신고 경위와 파출소 경찰관과의 대면 상황, 김씨의 모습 등 당시 상황을 기초로 경찰이 재량껏 판단해 현행범으로 체포한 절차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박 판사는 “현행범 체포 후 사후 영장을 청구 받은 점 등을 종합할 때 압수수색 및 현행범 체포가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수사과정에서 취득한 증거의 증거능력도 인정했다.

박 판사는 김씨가 지난해 12월 출소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마약을 투약하는 등 모두 6차례 마약류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는 점도 양형 이유로 들면서 “죄책이 굉장히 무겁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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