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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김보겸의 일본in]'불량배 스포츠' 취급받던 스케이트보드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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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서 천덕꾸러기 취급 받던 스케이트보드

스케이트보드 다룬 만화 인기

올림픽선 잇따라 스케이트보드 금메달 낭보

초등생 수강생 급증…작년보다 두 배 늘어

이데일리

일본 애니메이션 . 캐나다 혼혈이자 스케이트보드 재능을 타고난 란가(왼쪽)와 노력파 레키(오른쪽)의 성장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사진=SK에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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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애니메이션이 불을 붙이고, 도쿄올림픽이 폭발시켰다. 2020 도쿄올림픽 공식 종목이 된 스케이트보드 얘기다. 올 1월 스케이트보드를 소재로 한 TV 애니메이션 ‘SK∞(SK에이트)’가 방영되면서 주목받더니, 젊은층의 관심을 끌겠다며 도입한 스케이트보드 종목에서 일본이 남녀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면서 일본 열도가 스케이트보드에 열광하고 있다.

일본에서 스케이트보드는 불량아들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한밤중에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가 하면, 묘기를 부린답시고 난간이나 벤치를 파손하고, 보행자를 들이받는 사고도 종종 일어나서다. 한국으로 치면 전동킥보드 무매너 이용객, 이른바 ‘킥라니(킥보드와 고라니의 합성어)’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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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보드가 익숙한 란가는 양 발을 스케이트보드에 묶고 시합에 임한다(사진=SK에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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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눈총을 받는 와중에, 올 1월 일본에선 SK에이트가 공개되면서 스케이트보드의 매력을 알렸다. 제목은 ‘스케이트 너와 무한대(Skate Kimi to ∞)’의 줄임말로, 스케이트보드를 통한 무한한 즐거움이란 뜻이다. 감독인 우츠미 히로코가 스케이트보드를 소재로 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라서다. 원래 스노보드가 취미인 우츠미 감독은 눈 쌓인 곳을 찾으러 다니기가 힘들어 친구들이 추천해준 스케이트보드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이는 후술할 주인공 ‘란가’의 설정에 반영됐다. 또 하나는 지금껏 스케이트보드를 다룬 애니메이션이 없기 때문이라는 전략적 판단이라고 한다.

SK에이트의 줄거리는 이렇다. 스포츠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타입인, 노력파이지만 재능은 (상대적으로) 없는 레키와 캐나다 혼혈 설정의 천재형 주인공 란가가 투톱으로 등장한다. 일본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이 만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며 인정하고 성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악역처럼 묘사된 상대편 역시도 레이스를 펼친 뒤에는 다시금 주인공을 응원하는 면이 있어 청춘 성장물 성격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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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은 자정이 되면 폐쇄된 광산에서 극비리 레이스 ‘S’에 참가한다(사진=SK에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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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보드가 불량아 스포츠라는 인식은 작중에서도 잘 드러난다. 레스토랑 점주이자 스케이트보드 선수로 나오는 ‘조’는 “스케이트보드를 탄다고 돈을 버는 것도,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도 아냐”라고 한다. 작중 최강자에게 스케이트보드를 가르쳐 준 ‘타다시’는 한 술 더 뜬다. “스케이트보드는 위험해. 살짝만 다쳐도 큰 부상으로 이어지고 이미지도 안 좋아. 여전히 불량배나 탄다는 이미지가 붙어 다니고 사람들 눈은 냉담하지. 열심히 단련해도 야구나 축구처럼 돈도 못 벌어. 야만스럽고 마이너하고 불행해지기만 할 쓸데없는 놀이”라는 그의 대사는 만화적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내 스케이트보드의 위상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레이스 설정에서도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듯 하다. 등장인물들은 폐쇄된 광산에서 관계자만 출입가능한 극비리 레이스 ‘S’에 참가한다. 여기에 승부를 내는 데 반칙이나 폭력도 허용한다는 점, 심야에만 열린다는 점은 스케이트보드 시합 참가자들이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곳에서 작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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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탄 스케이드보드에 헤매는 것도 잠시, 타고난 재능으로 란가는 레이스에서 차례차례 승리를 거둔다(사진=SK에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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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SK에이트는 스포츠 만화답게 스케이트보드의 매력에 대해 줄곧 이야기한다. 레키는 전학생 란가의 압도적인 재능에 좌절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포기하려 하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이유를 다시금 떠올린다. 꾸준히 연습하면 점점 할 수 있는 게 늘어난다는 것.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즐거운 것이라고 말이다.

캐나다인 아버지로부터 두 살때부터 스노보드를 배운 란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왔지만 이곳은 1년 내내 여름이라 스노보드를 타지 못한다. 대신 란가는 눈이 안 와도 탈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성장하며 이를 소개해 준 레키와도 우정을 쌓는다.

만화를 통해 스케이트보드의 인기가 높아지는 와중 도쿄올림픽에서는 스케이트보드 대표팀의 낭보가 잇따랐다. 올림픽 사상 최초로 채택된 스케이트보드에서 일본이 금메달을 두 개 따내면서다. 지난달 25일 남자 스트리트 결승에서 승리한 호리고메 유토(22)에 이어 바로 다음날 니시야 모미지(14)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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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여자 스트리트에서 금메달을 딴 니시야 모미지 선수(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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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일본 스케이트보드 교실에는 초등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NHK에 따르면 도쿄올림픽 스케이트보드 경기장에서 불과 2km 떨어진 스케이트보드 교실에 초등학생 수강생이 급증하고 있다. “호리고메 선수 경기에 반했다”는 여자아이부터 “나랑 비슷한 나이에 금메달을 딴 니시야 선수가 대단하다”며 올림픽을 노리는 남자아이까지. 이 스케이트보드 교실 수강생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늘었다고 NHK는 전했다. 호리고메 선수의 경기를 보고 의욕에 불이 붙었다는 16세 남자 고등학생은 “같은 고향으로서 정말 자랑스럽다”며 “호리고메 선수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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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이틀 앞둔 지난 25일 호리고메 유토 선수가 인스타그램에 오시마 코마츠카와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이 공원은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스케이트보드를 배운 곳이다. 현재는 스케이트보드 금지령이 떨어졌다(사진=호리고메 유토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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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스케이트보드가 일본 내에서 주류로 인정받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 선수들이 잇따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스케이트보드는 여전히 천대받는다. 호리고메 선수의 어릴 적 연습장이었던 오시마 코마츠카와 공원에서 현재 스케이트보드를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는 이 곳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는 경비원이 달려와 제지한다고 한다. 도쿄의 10대들 사이에선 스케이트보드를 탈 만한 곳이 없을뿐더러 보드 반입조차 금지하는 곳이 태반이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농구 좋아하세요?” 일본을 대표하는 스포츠만화 ‘슬램덩크’는 1990년대 야구에 밀리고 축구에 치이던 농구의 위상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농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한 몫 했다는 평가다. “작가가 좋아하는 것을 다뤄야 보는 사람들에게도 매력이 먹혀든다”며 자신의 취미인 스케이트보드를 만화화한 SK에이트 감독과도 겹쳐 보인다. 그전까지는 인기 없는 종목인 농구와 스케이트보드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점도 비슷하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도쿄올림픽에서의 금메달과 SK에이트를 계기로 불량배 스포츠로 인식되던 스케이트보드의 위상도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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