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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염전노예의 목숨 건 편지 한통···천사섬 그곳은 지옥섬이었다 [뉴스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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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내셔널팀장의 픽: "장애인 불법고용 금지" 신안군의 초강수



2014년 1월 23일 전남 신안군 한 외딴섬. 소금장수로 위장한 경찰관이 염전에 있던 김모(47)씨에게 다가갑니다. 김씨는 “경찰서에서 왔다”는 경찰의 말에 뛸 듯이 기뻤답니다.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보낸 편지가 어머니에게 도착했음을 직감한 겁니다.

당시 김씨는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인데도 여름용 감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7년 6개월여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안 염전노예 사건’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염전에서 탈출한 김씨가 경찰에게 털어놓은 얘기는 끔찍했습니다. 허름한 창고 같은 방에 감금된 채 하루 다섯시간도 못 자고 소금을 밀고, 담는 일을 되풀이했답니다.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역을 하는 도중에는 숱하게 맞기도 했습니다.

세 차례 탈출 시도도 했으나 마을주민들이 염전 주인에게 알리는 바람에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고심 끝에 김씨는 읍내에 이발을 하러 간 길에 간신히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칠 수 있었습니다.



신안 7년 따라다닌 ‘염전노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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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전남 신안군에서 염전노예 사건이 터진 후 섬 염전에서 일을 하는 인부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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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급 시각장애인 김씨는 2012년 7월 염전 주인에게 단돈 100만원에 팔려왔다고 합니다. 서울 영등포의 한 노숙자 무료급식소에서 만난 직업소개업자의 꾐에 빠진 게 화근이었습니다.

이후 김씨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외딴섬 염전에서 1년 6개월 동안 강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3개월만 일하라고 속인 후 섬에 팔아넘겼다”고 썼습니다.

김씨사건의 파장은 컸습니다. 신안을 비롯한 전남 전역의 염전에 대한 전수조사가 진행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사한 행위를 한 염전 업주들이 속속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전국 최대 산지인 신안의 천일염이 “염전노예의 섬에서 만든 소금”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겁니다.

여기에 경찰이 “염전노예 실태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전국적인 공분까지 샀습니다.



“염전노예의 섬에서 만든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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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보랏빛으로 물든 전남 신안군 반월·박지도.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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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7년 6개월이 지났지만, 주민들은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응입니다. 염전노예 사건 후 무분별한 지역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안에서 천일염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부터 사라져야 한다”는 게 한결같은 반응입니다.

신안군 또한 염전노예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어 왔습니다. 천사섬이란 ‘이름 마케팅’과 퍼플 섬이란 ‘컬러 마케팅’이 대표적입니다. 천사(1004) 섬이란 신안군 관내에 유인도와 무인도가 1004개가 있다는 점에서 착안한 마케팅입니다.

퍼플 마케팅이 이뤄진 곳은 반월·박지도입니다. 안좌도에서 반월·박지도로 넘어가는 길목 초입부터 보랏빛 지붕의 집들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입니다. 섬으로 넘어가는 연륙교도 모두 보라색으로 칠해 상징성을 부여한 것도 관광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를 본 미국 폭스뉴스가 “한국의 반월도는 퍼플 섬으로 만든 후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소개할 정도입니다.



“퍼플섬·천사(1004)섬이라 불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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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전남 신안군 암태도 기동삼거리에 설치된 벽화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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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노예에 대한 강박관념은 최근 박우량 신안군수의 지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박 군수는 지난달 28일 “신안군 관내에서 장애인 불법고용이 적발되면 염전 등의 허가를 취소하고, 고발 조치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염전·새우 양식장에서 장애인을 불법고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이 원해도 못하게 해야 한다”며 “신안군에서 장애인을 불법고용한 것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자칫 장애인 차별성 발언처럼 볼 수 있는 지시에 주민 상당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만큼 염전노예라는 오명이 치명적임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박 군수의 지시에 따라 신안군은 이달 들어 관내 염전과 새우 양식장 등의 장애인 불법고용 실태에 대한 특별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당국의 엄정한 조사에서도 단 한 건의 불법행위도 적발되지 않음으로써 염전노예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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