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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130년 만에 부활한 ‘위안스카이 망령’...이번엔 대한민국 주권 뒤흔드나 [송의달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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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꿈틀거리는 위안스카이의 후예들 [코리아 프리즘]

구한말 조선 조정을 10여년간 짓밟은 중국 관료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1859~1916). 그의 망령(亡靈)이 한반도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2021년 여름 한국인들에게 그는 불망(不忘)의 대상이다. 3가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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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23세에 조선으로 들어오기 직전 위안스카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진압을 주도한 그는 조선을 '근대적 식민지'로 만들려는 청나라 정책을 집행한 현장 책임자였다./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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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철저하게 봉쇄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 12년 간의 마지막 ‘홀로서기’ 기회를 좌절시킨 장본인이다. 둘째로 그 과정에서 조선에 치욕을 안긴 그의 오만방자한 언동(言動)은 중국(청나라) 지도부의 한반도 전략과 가치판단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세번째로 21세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지금도 ‘제2, 제3의 위안스카이’를 한국에서 획책하고 있어서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 의정부시에 걸친 도봉산 꼭대기에 있는 망월사(望月寺) 현판은, 지금부터 정확히 130년 전인 1891년 가을 위안스카이가 직접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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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가 쓴 도봉산 ‘望月寺(망월사)’의 현판. 양편 글귀는 ‘駐韓使者袁世凱(주한사자원세개), 光緖辛卯仲秋之月(광서신묘중추지월·1891년 가을)’/망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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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납치, 갑신정변 진압의 주범

하지만 그와 한반도와의 인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 직후 시작됐다. 청나라에서 급파된 군대 사령관(吳長慶)의 보좌관(정식 명칭은 行軍司馬)이라는 미관말직 신분이었다. 23세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의 주범으로 지목된 흥선대원군(고종임금의 아버지)을 중국 텐진으로 납치하는 일을 현장에서 결행했다.

2년 후 김옥균(金玉均) 주도의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때에는, 주저하는 두명의 청나라 장군과 달리 출병(出兵)을 강력 주창하며 1500여명의 청군을 이끌고 창덕궁 정문으로 들어가 200여명의 일본군을 꺾고 무력 진압했다. 그의 ‘내정 간섭’으로 개화당의 자주개혁 시도는 ‘삼일(三日) 천하’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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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 망명지 일본에서 찍은 개화당 주역 4명.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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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귀국할 때까지 위안스카이가 저지른 방자함과 조선 조정 유린(蹂躪) 사례는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무단출입했고, 조선 정부 공식행사에선 언제나 상석(上席)에 앉았다. 툭하면 군복 차림으로 궁궐 안까지 가마 타고 들어가 고종에게 삿대질했다.

◇조선의 마지막 자주적 근대화 기회 봉쇄

위안스카이의 사실상 ‘식민지 총독’ 행세는 1885년 10월 시작됐다. 갑신정변에서 공을 세운 뒤 1884년 11월 일시 귀국했다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조선에 다시 오면서부터다. ‘조선 주재 청나라 교섭·통상 대표’라는 직책은 도원 3품으로 지방정부 도지사에 해당한다(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의 분석).

위안스카이는 상관인 리훙장(李鴻章·이홍장·1823~1901) 청나라 북양통상대신에게 보낸 전보(電報)에서 “조선에는 반드시 청나라에서 보낸 감국대신(監國大臣)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리고 9년간 조선에 머물며 그 역할을 했다. 위안스카이가 26세부터 35세까지이던 시절이다. 그의 전횡과 횡포를 보여주는 사례 두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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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훙장 등 청국 대표단(그림 오른쪽)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대표단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벌인 청일전쟁 강화회담 장면을 그린 일본 전통회화 우키요에(浮世繪)/일조각 제공


#1886년 7월초,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와 손잡고 청나라에 항거할 계획(제2차 조로[朝露] 밀약)을 세운 걸 탐지한 위안스카이는 날조한 전보를 가지고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했다. 그는 “이씨(李氏) 가운데 현명한 사람을 뽑아 새로운 왕으로 세우겠다” “병사 500명만 있으면 국왕(고종)을 폐하고 납치해 톈진에서 신문·조사케 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1887년 6월, 조선 조정이 박정양과 심상학을 주미공사와 주유럽공사로 임명하자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보고하지 않았다”며 파견 중지를 요구했다. 조선 외교관들에게는 ‘준칙3단(準則三端)’ 이행을 강요했다. ‘연회장에서 조선 공사는 항상 청나라 공사 뒤에 앉고, 조선 공사는 청나라 공사를 방문해 그를 대동해 외부에 가고, 중대 교섭 사건은 청나라 공사와 미리 상의하라’는 내용이다. 조선의 외교권 완전 박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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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의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1841∼1905)이 미국 워싱턴DC에서 서울의 미국인 육군 군사교관 앞으로 1886년 6월 12일 보낸 편지. 그는 "조선 군인들을 정예 병사로 키워달라"고 당부했다./조선일보DB


◇“중국이 일본 보다 앞서 ‘조선 亡國’ 시켜”

조선 해관(海關·요즘 관세청)이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 홍삼 밀수출을 적발·단속하자,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해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청나라 상인들을 비호했다. 나아가 청나라 병사들이 탄 배에는 조선 세관 당국의 검사는커녕 입선(入船)까지 금지시켰다. 청나라 군인, 상인, 외교관들의 밀수와 불법이 만연했다. 외국과의 차관 협정과 전신·통신 설치, 선박 운항도 위안스카이의 허가와 승인을 받도록 하며 ‘조선은 중국의 속국(屬國)’임을 각국에 알렸다.

<감국대신 위안스카이>라는 연구 단행본을 2019년에 낸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1880년대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 주체의 뿌리가 통째로 뽑혔다. 조선의 주권은 무력화됐고,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고, 구미 선진국과의 외교 교섭 기회는 차단됐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에 앞서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망국(亡國)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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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2019년에 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위안스카이 연구 단행본/송의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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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조선 현장 책임자’였을 뿐”

분명한 것은 조선에서 위안스카이의 폭압적 행태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청나라의 대(對)조선 방략이란 큰 그림 아래 묵인되고 조장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청나라의 방침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책임자였을 따름이다.

고종 임금과 그의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1838~1900) 등이 위안스카이를 면직(免職)시켜달라고 여러번 청나라에 청했지만, 그는 거꾸로 세차례 유임되며 9년간 조선의 ‘감국대신’으로 군림했다. 리훙장이 밝힌 그의 유임 근거는 “상국(上國)의 체통을 유지하고 조선을 조종해 조선이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이홍장전집, 1889년 11월16일자).

조선 사정을 숙지한 위안스카이가 고종과 조정 신하들을 견제·조종해 대국(大國)을 비익(裨益·살찌움)하게 하는 유능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는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대(對)조선 정책 목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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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90년대 청나라의 조선 정책을 총괄한 리훙장 북양통상대신/조선일보DB


1882년 11월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도 조선에 대한 야욕(野慾)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장정은 ‘조선은 청의 종속국’임을 명문화하고 청나라에 광범위한 영사재판권(치외법권) 인정과 조선 연안에서의 어채(魚採), 연해 운항 순시, 의주·회령의 육로 무역 허용 같은 경제·외교적 특권을 허용하도록 강제로 못박았다.

같은해 5월과 8월에 각각 체결된 ‘조미(朝美) 수호조약’, ‘조일(朝日)조약’ 보다 조선에 훨씬 불평등했다. 아편전쟁(1842년) 이래 동아시아에서 체결된 구미(歐美)의 불평등 조약 가운데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조선에 열악한 내용이라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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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조선일보DB


◇“최악의 불평등 강요한 중국...급격한 ‘조선 속국화’ 추진”

박 훈 서울대 교수(동양사학과)는 당시 양국 관계와 의미를 이렇게 분석한다.

“병자호란(1637년) 이후 조선과 청나라는 명목상 조공(朝貢) 관계였다.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대접하는 외교 의례만 지키면, 나머지는 거의 조선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거나 청의 관리가 서울에 주재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청나라는 조선 속국화(屬國化)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했다. 북양대신 리훙장과 그 부하인 마젠쭝(馬建忠), 위안스카이가 주도자였다. 청나라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전까지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방해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같은 매우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강요했고, 위안스카이는 사실상 총독으로 군림했다.”

박 훈 교수는 “조선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청의 야욕이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았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했다. 위안스카이를 통해 구현된 청나라 정책이 조선의 망국을 촉발한 결정적 도화선(導火線)이 됐다는 지적이다.

◇한국에 또 등장한 ‘21세기 위안스카이’들

더 큰 문제는 그로부터 130여년쯤 지난 한반도에서 ‘위안스카이 망령’이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틈만 나면 되풀이되는 주한중국대사의 오만방자한 언동이 대표적이다.

2016년 2월 23일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는 당시 제1야당 대표이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만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한국에 배치되면 한·중관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공개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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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2021년 5월24일 서울 한 호텔에서 '중국공산당 100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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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5개월여가 지난 이달 16일,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는 “천하의 대세를 따라야 창성한다. 한중 관계는 한미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다”며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언론 인터뷰를 대놓고 비판했다.

국제 외교가의 관례를 깬 이같은 행태는 한국을 하대(下待)하는 중국공산당의 ‘본심’에 근거한 의도적인 도발이다.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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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17년 4월6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비공식 회동하고 있다/조선일보DB


“한국의 국력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130여년 전 위안스카이의 폭주(爆走)를 능가하는 망동(妄動)이 판을 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이다.

◇“중국이 통일과 경제에 중요하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

구한말부터 해방 정국까지 한국정치사(史)를 천착해온 신복룡 전 건국대 대학원장(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역임)은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를 ‘동맹’이나 ‘아픔을 나누는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 절대로 베푸는 나라가 아니다. 2021년 지금도 한국을 속국으로, 자신은 종주국으로 여길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치인과 리더들은, 중국이 한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나라라는 생각과 중국이 한반도 통일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두가지 헛된 환상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은 민족에 해악(害惡)이 되는 중대한 오판(誤判)이다. 중국공산당의 본질과 속성을 꿰뚫고 강소국(强小國)으로서 당당하게 처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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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대학원장/조선일보DB


2013년부터 3년간 외교부 정책기획관으로 근무한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지난 20년간 중국이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면서 한국 외교의 근본 마저 흔들리고 있다”며 “중국과의 관계에서 경제 보다 주권(主權)과 독립을 최우선시하는 외교의 정상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센터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은 미국만 없다면, 한국 정부가 중국의 뜻에 반하는 외교정책을 절대 펼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위안스카이와 같은 중국의 횡포에 우리가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면 한미(韓美) 동맹을 강화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도이다. 우리 국민과 지식인들도 중국(청나라)이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일본보다 앞서 처절하게 압살한 역사를 잊지 말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송의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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