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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용석]코로나19 급행열차가 바꿔 놓은 기업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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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기업들 역대 최대 규모 M&A 나서

“변화 속도 놓친 기업 뒤처질 것” 위기감

동아일보

김용석 산업1부장


몇 년이 지난 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평가한다면 그중 하나는 ‘여러 대의 급행열차가 출발한 시기’로 기록될 것 같다. 개인이 자산을 어떤 형태로 두느냐에 따라 벼락거지가 생겨난 것처럼 기업도 어떻게 사업을 바꾸느냐에 따라 운명이 극적으로 갈리는 시기가 될 것으로 본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국내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인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내재 역량으로 기술 흐름을 따라잡거나 스타트업이 만든 시장에 뒤늦게 진입해도 충분히 빼앗을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은 한국 창업 생태계의 고질적인 한계로 꼽혔다. 창업가들은 엑시트(exit)할 길을 쉽게 찾지 못한 고립된 혁신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상황은 급반전했다. 유망 스타트업을 인수하려는 대기업이 줄을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외 스타트업을 포함해 대기업들의 인수합병(M&A)은 역대 최대 규모로 치닫고 있다.

동아일보가 리더스인덱스와 함께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 500대 기업의 M&A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다. 14조4000억 원이었던 지난해 전체 규모를 이미 뛰어넘었다. 현재 진행 중인 M&A가 모두 성사될 경우 총액은 ‘32조 원+알파’에 달한다. 이런 현상은 국내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올 상반기 M&A 규모는 지난해의 3배 이상으로 커진 역대 최대 규모다.

풍경이 바뀐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 것이라는 강한 시그널과 한계기업의 정리가 겹쳤고, 여기에 넘치는 유동성이 더해지면서 변화의 불씨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 됐다.

이 속도와 방향을 맞추지 못한다면 큰 덩치는 의미가 없어졌다. 5대 그룹 소속의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지금 우리 회사의 주요 사업을 판다고 하면 시장에서 얼마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나”라고 자조했다. 세상의 속도감이 달라지자 자신의 느린 속도가 두드러진 것이다. 다른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은 “성장 속도가 빠른 기업이나 사업에 투자해 급행열차에 올라타지 못하면 몇 년 뒤 그저 연명만 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팬데믹은 또 국제 분업과 통합된 시장 대신 지역주의의 원심력을 강하게 작동시키고 있다. 미국 인텔 반도체 재건에 미국 정부가 지원했고 아마존과 퀄컴이 호응하고 나섰다. 인텔은 4년 만에 2나노 반도체를 만들어 TSMC와 삼성전자를 제치는 초고속 추격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인텔의 세계 3위 글로벌 파운드리 인수 추진 소식이 전해지고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낸드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등 시장은 그야말로 지각변동에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의 의사 결정 체계는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동아일보 조사에서 M&A 건수 기준 압도적 1, 2위를 차지한 카카오와 네이버는 5년 동안 각각 47개, 30개의 기업을 쓸어 담으며 빠른 속도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200조 원 넘는 유동자산을 손에 쥐고 적극적 M&A를 매번 공언하면서도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고민해 온 한계 사업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다. 의사 결정 체계에 큰 공백이 생기면서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유야 어쨌건 한국의 대표 기업이 급행열차에 오르기는커녕 열차 플랫폼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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