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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조영남 "낚시바늘 코 꿴 리타 김, 이대 총장 빵터진 사건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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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구사력 탁월한 김동길 박사

미 전도집회 참석차 체류 때 인연

함석헌 만남 주선 약속했지만 불발

낚싯바늘에 코 꿴 선배가수 리타김

내 인생에서 가장 강도 세게 웃어

전해들은 김옥길 총장도 “큭큭큭”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22〉 보고 싶은 사람



나는 우리나라 전체에서 언어 구사력이 가장 탁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김동길 박사님을 대략 35년 전부터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가 언어 구사 능력에서 김동길 박사님과 막상막하인 아나운서 김동건 형님(선배님이라 할까 했는데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형님으로 정했다. 아! 우리네 존칭의 편치않음이여!)과 함께 김동길 김동건 조영남 3인 TV 토크쇼 ‘낭만논객’을 했던 적이 있다.

한참 전 198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김동길 박사님이 당시 정치계에서 잘 나가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향해 “3인은 낚시나 가라” 했으니 그 여파가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김 박사님은 미리 계획된 미국 서부지역 전도 집회에 참석한다고 미국 LA에 오셨던 건데 사람들은 3김은 낚시를 보내놓고 정작 본인은 미국에 몸을 숨겼다고 수군거렸다. 마침 나는 그때 스탠퍼드 대학이 있는 팔로알토의 친하게 지내던 경기여고 출신 윤영숙 누님네 머물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김 박사님 역시 나와 함께 영숙이 누님네 집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김 박사님을 만나 뵙게 된 거다.

아나운서 김동건 말솜씨도 막상막하

중앙일보

생전의 함석헌(1901~1989). 독립운동가·기독교사상가·민주화운동가였다. [중앙포토]


사람들은 TV 쇼에서 내가 김 박사님께 종종 무례했다고들 그러는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면 나는 일찍부터 허물없이 친했기 때문이다. 김동건 형은 김 박사님의 연대 직계 스승과 제자 관계이다. 동건 형이 평소 김 박사님을 대하는 모습을 실제 보면 그냥 와! 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하시다.

팔로알토의 영숙이 누님네 집에서 김 박사님과 함께 숙식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아침 김 박사님이 나한테 “어이 조 군! 우리 총장님 전화 좀 받아봐” 하시는 거다. 여기서 총장님이란 김 박사님의 친누님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님을 일컫는 것이다. 나는 오잉? 단 한 번 뵌 적도 없는 총장님이 웬일로 나를 찾으시나 하면서 전화(국제전화)를 받아 얼른 “예! 저는 조영남입니다” 큰 소리로 말했는데 저쪽에선 아무 말도 없이 연신 “큭큭큭큭” 하시며 말을 못 꺼내다가 겨우 “나 동길이가 얘기하는 코 꿴 얘기 들었어. 큭큭큭큭 헷헷헷헷” 하시는 거다. 나는 그때 어떻게 전화가 마무리됐는지도 기억이 없다. 내 인생 최초의 김옥길 총장님과의 전화통화 내용은 그저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그럼 코 꿴 얘기는 뭔가?

오래전 내가 미국의 최남단 탬파 플로리다에서 학교를 다닐 때 얘기다. 지금은 세계 최정상급의 여배우로 변모한 윤여정 여사와 함께 살 때다. 그때 우리 부부는 우리를 미국으로 이끌고 가셨던 김장환 목사님의 가까운 친구였던 케네스 목사님이 제공해준 교회와 붙어 있는 사택 한 채에 살게 되었는데 얼마 후엔가 같은 동네 해변가 호텔을 인수해서 이사를 오게 된 맥밀런씨의 부인이 바로 내 선배가수 리타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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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리타김. [중앙포토]


리타김은 ‘여인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한국 가요계에 등단, 지금은 은퇴하신 패티 김 선배와 동시대에 미8군 쇼단에서나 동남아 특히 홍콩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다. 우리 때는 극장식 쇼 무대에서 MC들이 낯선 가수들이 등장할 때 유행처럼 되뇌었던 소개말이 있다. “여러분! 방금 동남아 무대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가수 리처드 조입니다.” 리타김이야말로 진짜 동남아 순회공연 때 영국계 미국인 맥밀런씨를 만나 결혼하는 바람에 한국 연예계에서 일찍 퇴장하게 됐는데 세월이 흘러흘러 공교롭게도 우리가 자리 잡고 살던 탬파 플로리다 같은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당연히 가까워졌음은 물론이다. 특히 그쪽 아이 데이비드와 우리 쪽 아이 얼이 같은 나이, 같은 학교라서 우린 학부모로서도 가까워졌던 것이다.

맥밀런과 리타김의 해변가 수영장 딸린 대저택에는 뒷마당과 연결돼 바다 위로 나가는 길쭉한 데크(나무 통로)가 있어 데크의 끝자락엔 간이 식탁까지 놓인 아늑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그 날 오후는 우리가 모두 함께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는지 하여간 우린 그 날 정장 차림으로 데크로 나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두 아이는 바다낚시를 한다고 떠들어대고.

그러다가 한순간 으악! 괴성을 지르며 리타김이 얼굴을 감쌌고 맥밀런이 부인의 얼굴을 헤치며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때 나는 얼핏 봤다. 낚싯바늘이 리타김의 얼굴 중앙 한쪽 콧구멍을 정통으로 꿴 것이었다. 그녀의 아들 데이비드가 낚싯줄을 멀리 던진다고 뒤를 쳐들었다가 힘껏 앞으로 내 던지는 순간 낚싯바늘이 바로 뒤에 있던 자기 엄마의 코를 꿰게 된 것이다. 상상해 보시라! 코를 꿴 채 획! 던지는 힘에 끌려야 했던 순식간의 고통을. 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는 이 순간 커다란 철학적 실험을 완수했다. 그것은 감성이 이성을 단연 이긴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맥밀런이 부인의 양손을 헤치는 순간 그것의 실태를 쓱 보게 되었다. 나는 안타까움과 고통스러움을 함께 표현했어야 마땅했는데 그렇게 못 했다. 웃음이 쏟아져 나오는 걸 참아야 하는 고통에 직면하게 된 거다. 감성이 이성을 앞선 것이다. 코끝에 매달린 미끼용 주꾸미 다리에 송골송골 맺힌 핏방울이 정말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낚싯바늘은 속성상 뺀다고 흔들면 더 깊숙이 파고든다는 걸 전혀 모르던 터. 우리는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 해결하자는 의견일치를 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는데 내 얘기의 핵심은 지금부터다. 먼저 리타김의 남편 맥밀런이 부인을 일으켜 세우고 문제의 낚싯대를 짊어지듯 어깨 위로 치켜들고 행여 당기지나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런 자세로 앞장을 서고 코를 꿴 당사자는 코에서 연결된 줄이 잘못 당겨질까 봐 줄을 코앞에서 한 뼘가량 여유 있게 당겨 잡고 앞장선 남편을 이인일조로 따라간다. 그 뒤로 리타김의 외아들이 대역죄나 진 것처럼 풀 죽어 뒤를 따르고 그 뒤로 우리 아들 그리고 윤 여사님, 그다음이 나다. 서서히 아주 조심스럽게 코 꿴 이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데크를 지나 뒷마당 수영장을 거쳐 리타김네 응접실에 붙은 화장실을 향해 낚싯줄로 연결된 맥밀런과 리타김은 들어가고 나머지 멤버들은 응접실에서 초조히 기다린다. 드디어 5분쯤 지나 화장실 문이 열리며 또다시 아까 처음 코 뀄을 때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두 번째 비명은 아파서 생기는 비명이 아니라 폭발적인 웃음에서 나오는 소리다. 리타김이 화장실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 낚싯줄을 가위로 짧게 자르고 거울에 비친 코 꿴 모습이 자기 자신이 봐도 너무 우습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내지른 비명소리였다. 자신의 콧속에 매달린 낚싯바늘과 낚싯바늘에 연결된 피맺힌 주꾸미가 본인도 우스워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우리 부부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맥밀런 부부가 병원을 향해 떠나고 부부만 남게 된 우리는 그때부터 웃기 시작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네들이 병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넓은 응접실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며 웃어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생활체험, 사람이 지나치게 웃게 되면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 거다. 코 꿴 사건은 내 파란만장한 인생 77년 안에 가장 강도 세게 웃게 된 사건이었다.

의사·화가·농부·어부 꿈꿨던 함석헌

중앙일보

TV 토크쇼를 함께 했던 김동건·김동길·조영남씨. 사진을 활용한 조씨의 2014년 작 ‘나의 길’의 일부다. [사진 조영남]


김동길 설교 조영남 특송의 미 서부지역 전도집회를 전부 마치고 헤어지는 날 나는 김 박사님께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

“김 박사님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뭔가 조 군, 말해보게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다 만나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단 한 분, 만나 뵙고 싶은데 못 만났습니다.”

“그게 누군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저자 함석헌 선생님이십니다.”

“그래? 그게 무슨 문제야. 한국 오는 대로 내가 소개해주지.”

“고맙습니다.”

아! 그런데 내가 한국에 들어가 우물쭈물하다 끝내 못 만나 뵈었다. 함 선생은 1989년에 세상을 뜨셨다. 나는 지금까지 쭉 후회하고 있다. 못 뵌 것을.

왜 내가 그 당시 그토록 함석헌 선생을 마지막 보고 싶은 사람으로 결정했는가. 그때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기고만장한 나머지 『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책을 쓸 땐데 내 생각에 한국 근대사에 나보다 먼저 예수한테 씨름 한판 걸어 끝낸 것처럼 보인 사람이 바로 함석헌 선생이셨다. 더불어 내가 함석헌 선생한테 홀딱 반한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훗날 정치인 안희정과 내가 만나 잡지 인터뷰를 하면서 안씨가 고등학교 때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읽고 분연히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찾아보니 월간중앙 2008년 2월호였다). 내가 함 선생을 롤 모델로 좋아한 첫째 이유는 ‘씨알’이라는 낱말을 고이 간직해서 우리에게 남기신 업적(함 선생이 사용한 ‘씨알’의 의미는 단순한 종자나 열매가 아니다. 심오한 뜻이 있다). 둘째 이유는 잘 생기셨다.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의 얼굴 모습은 그냥 보통사람과 왠지 다른 것 같다. 가령 전봉준이나 안중근의 얼굴 모습과 비슷한 함석헌 선생의 비장한 얼굴 모습. 셋째 선생의 종교관. 기독교이면서 무교회주의를 꺼내셨던 바다처럼 넓은, 말 그대로 ‘씨알’ 같은 맘씨. 넷째, 역사책에 문학과 철학을 얹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의사가 되려다 뜻을 못 이루고 농부가 되려다 농부가 못 되고 어부가 되려다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이렇게 나가다가 놀랍게도 앞의 의사와 농부 사이에 미술에 뜻을 뒀다가 뜻을 못 이뤘다는 대목도 나온다. 나로선 놀랄 수밖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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