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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원통형, 각형, 파우치형 … 전기차 배터리 삼국시대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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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기자]

폭스바겐은 자사 전기차에 '파우치형 배터리'를 탑재한다. 테슬라는 다르다. 그들의 주력은 '원통형 배터리'다. 반대로 '각형 배터리'를 고집하는 완성차 업체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인 LG에너지솔루션은 파우치형ㆍ원통형, 삼성SDI는 각형ㆍ원통형을 생산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 최대의 배터리 제조사인 CATL은 3가지 모양의 배터리를 모두 생산ㆍ개발하고 있다. 반면 SK이노베이션은 '파우치형'에 올인했다.

어떤 배터리를 탑재하느냐가 완성차업체의 마음에 달려 있다면 중국 CATL의 선택이 가장 합리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국내 배터리 제조업체들은 왜 CATL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이들의 전략이 향후 다가올 '전기차 배터리 통일론'과 맞닿아 있는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전기차 배터리 삼국시대의 현주소와 미래를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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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배터리를 둘러싼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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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동차의 '심장'에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엔진을 밀어내고 자동차의 새 심장을 차지한 건 '배터리'다. 내연기관 대신 전기모터가 자동차의 주동력원이 되면서 일어난 대격변이다.

배터리가 전기차의 핵심 부품으로 올라선 만큼 자동차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최신 기술의 각축장도 배터리 시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런데 배터리 시장을 살펴보다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원통형, 각형, 파우치형 등 서로 다른 모양의 배터리가 치열하게 점유율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문인지 완성차업체들이 자신들의 전기차에 '어떤 모양'의 배터리를 탑재하느냐에 따라 시장이 들썩이곤 한다.

배터리 제조사의 서로 다른 선택

예를 들어보자. 지난 3월 유럽 최대의 완성차업체인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전체 전기차 모델의 80%에 각형 배터리를 탑재한다고 밝혔다. 파우치형 배터리를 채택하기로 했던 폭스바겐이 입장을 돌연 바꿨기 때문인지 배터리 업계의 충격은 컸다. 폭스바겐의 '노선 변화'가 전체 배터리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완성차업체 포드는 지난 4월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식 채택했고, 전기차 시장의 선두주자 테슬라는 일찌감치 원통형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고 있다. 배터리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외 배터리 제조사의 대응 방법도 다르다. '선택과 집중'이냐 '다품종 승부'냐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인 LG에너지솔루션은 파우치형ㆍ원통형, 삼성SDI는 각형ㆍ원통형을 생산하는 투트랙 전략을 선택했다. 반면, 중국 최대의 배터리 제조사인 CATL은 3가지 모양의 배터리를 모두 생산ㆍ개발하고 있고, SK이노베이션은 '파우치형'에 올인했다.

이 지점에서 두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배터리를 탑재하는 게 완성차업체 마음이라면, 3가지 모양의 배터리를 모두 생산하는 중국의 CATL이 유리한 고지에 있는 건 아닐까.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배터리 모양이 한가지로 '통일'될 가능성은 없을까. 이 질문을 풀어보기 위해선 먼저 배터리 '폼팩터'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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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관건은 열과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력에 있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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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팩터는 배터리의 형태를 의미한다. 전기차 배터리는 크게 3가지 폼팩터로 나뉜다. 건전지처럼 둥근 기둥 모양의 원통형, 넓적한 직사각형 모양의 각형, 다른 두개보다 얇고 납작한 파우치형이다. 그렇다면 배터리는 왜 하필 이런 형태로 나뉘게 된 걸까. 해답은 '열'과 '에너지'에 있다.

가장 초기 배터리 형태인 원통형은 각 원료를 모아 두루마리 휴지처럼 돌돌 말아서 만든다. 대량 생산이 쉽고 빠른 데다 생산비용이 낮다는 장점이 있지만 배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을 처리하는 게 문제였다. 내부 온도가 높을수록 압력을 받아 배터리가 폭발할 위험이 커서다.

어떻게 하면 배터리 내부의 열을 낮출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물이 바로 각형 배터리다. 각형은 배터리 원료들을 사각형 모양의 틀에 담아 넓적하게 펼쳐서 만들기 때문에 열을 전달받을 수 있는 면적이 원통형에 비해 넓다. 그래서 똑같은 양의 열을 받아도 원통형보다 배터리 내부 온도가 낮다.

하지만 각형의 문제는 생산 과정에서 원료를 집어넣은 사각형 틀의 모서리가 찌그러지면서 빈 공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사각형 틀을 빈틈없이 꽉 채워야 배터리는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 빈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파우치형 배터리다. 파우치형은 배터리 원료를 집어넣은 사각형 틀을 종이처럼 얇게 자른 다음 비닐 재질의 파우치(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아 만든다.

빈 공간이 사라진 만큼 에너지 저장용량도 각형에 비해 많다. 다만 파우치형은 각형에 비해 두께가 얇아 외부 충격에 약하다. 제조 공정이 복잡해서 생산비용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 자! 이제 질문을 풀어보자. 3가지 폼팩터 모두를 택한 중국의 CATL, 2가지 폼팩터를 택한 LG엔솔ㆍ삼성SDI, 파우치형 하나에 올인한 SK이노베이션 중 누구의 전략이 통할까.

전문가들은 '다품종 전략'을 내세운 CATL이 무조건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김필수 대림대(자동차학) 교수는 "CATL은 글로벌 시장에서 파우치형의 점유율이 높아지자 지난해부터 파우치형 생산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면서 "하지만 파우치형 기술력은 우리나라 기업이 더 좋기 때문에 CATL 입장에선 자칫 개발 비용만 나가고 '규모의 경제'는 실현하지 못할 위험요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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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LG엔솔과 삼성SDI는 왜 '투트랙' 전략을 선택했을까. LG엔솔(원통형ㆍ파우치형)은 '확장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풀이된다. 원통형은 전기차뿐만 아니라 가정용 전자기기 시장서 수요가 있다. 파우치형은 무게가 가볍고 디자인 변형이 쉬워 다양한 형태의 전기차에 장착할 수 있다. 원통형과 파우치형 모두 활용도가 높은 셈이다.

삼성SDI(원통형ㆍ각형)는 '생산성'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원통형과 각형은 대량 생산이 용이하고, 파우치형과 달리 해외 공장을 짓지 않고도 국내에서 독자 생산해 납품할 수 있어서다. 파우치형은 전기차 디자인에 맞춰 형태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대신 차량 생산 초기부터 완성차 업체와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지공장 설립이 필수 요건으로 꼽히고 있다.

흥미로운 건 파우치형 배터리에 올인한 SK이노베이션의 선택이다. SK이노베이션의 과감한 결정은 기술력의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파우치형의 주도권을 잡으면서도, 언제든지 다른 폼팩터의 배터리를 생산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거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자체 개발한 제조공법을 통해 기존 파우치형의 취약점으로 꼽혔던 단가경쟁력과 안전성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면서 "다만 향후 시장의 변화에 대비해 각형 등 다른 폼팩터의 연구ㆍ개발(R&D)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배터리 하나로 통합될까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풀어보자. 과연 미래에는 배터리 '모양'이 통일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김필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로선 어떤 폼팩터가 우위를 확보할지 알 수 없다. 완성차 기업들이 배터리 선택권을 쥐고 있는 만큼 배터리 제조사들은 고객사를 만족시킬 만한 기술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최웅철 국민대(자동차공학) 교수 역시 "중요한 건 배터리 형태가 아니라 기술"이라며 "3가지 폼팩터 모두 '통일 가능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배터리가 나타나 시장을 장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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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의 논리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전기차 배터리는 '열관리'와 '에너지 저장용량'의 패러다임 속에서 진화했다. 두가지 패러다임이 번갈아가며 배터리 기술의 발전을 이끌면서 각 폼팩터가 갖는 단점도 개선해왔으니, 앞으로도 어떤 폼팩터에서 어떤 '기술 혁신'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가령, 파우치형보다 에너지 저장용량이 적다고 지적됐던 각형 배터리는 중국 CATL의 기술 개발로 기존 배터리 대비 더 많은 에너지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원통형 배터리 역시 테슬라의 주도로 기존 배터리보다 열관리 측면에서 진일보한 '신형' 출시를 목전에 두고 있다.[※참고: 테슬라의 신형 배터리는 탭리스(전류가 흐르는 통로인 '탭'을 없앤 것) 설계로 열 발생 위험을 낮춘 건 물론 구형과 비교해 에너지 저장용량은 5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 교수는 "결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패권은 기술력에 달려있다"면서 "열과 에너지를 지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시장의 승자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배터리의 진화는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을까. 진화의 끝에는 어떤 형태의 배터리가 기다리고 있을까. 최첨단 배터리를 향한 '기술력 레이스'는 지금부터다.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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