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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포기가 ‘올림픽 정신’이다[플랫] [오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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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 체조계의 살아있는 전설’ 시몬 바일스(24)가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단체전과 개인 종합 출전을 포기했다.

바일스는 27일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단체전 결선에 출전했다. 그는 첫 종목인 도마에 나섰다가 13.766이라는 낮은 점수를 받은 뒤,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잠시 경기장을 떠났다. 이후 나머지 3개 종목(이단평행봉, 평균대, 마루)을 뛰지 않고 기권했다.

미국체조협회는 “바일스가 의학적인 이유로 단체전 남은 종목을 기권했다”고 밝혔지만 특별한 부상은 없었다. 에이스를 잃은 미국은 결국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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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가 도쿄 아리아케 체조 센터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5일차 남자 종합 결승전을 관람하며 키스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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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일스는 왜 기권을 선택했나



단체전이 끝나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바일스는 기권을 선택한 이유를 직접 밝혔다. 그는 기권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며 “오늘은 마치, 당신도 알다시피, 아니오였다(Today it’s like, you know what, no)”고 했다.

이어 “나이를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예전처럼 체조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 올림픽을 나 자신을 위해 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후 개인종합 출전도 모두 포기했다.

바일스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4관왕에 빛나는 미국 체조계의 전설이다. 2013년 기계체조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 이후엔 모든 경기에서 단 한번도 져본 적이 없다. 13일 미국 광고 전문지 애드위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체조에 가장 많은 관심(59%)을 보였을 정도로 바일스의 금메달을 확실시했다.

자연스럽게 바일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졌다. 대표팀 동료의 코로나19 확진과 도쿄 올림픽의 잦은 일정변경도 그에겐 부담이었다. 그는 단체전 경기가 있기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기분”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바일스의 기권은 주변의 기대에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혹사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리우올림픽] 美 체조 바일스, 마루 금메달…여자 기계체조 4관왕





바일스의 결단에 체조계 응원



CNN에 따르면, 바일스는 오전 훈련에서 ‘트위스티스(twisties)’ 현상을 경험했다. 트위스티스는 몸이 공중에 있다는 사실을 뇌가 인지하지 못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있지 않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체조선수는 그동안 수천번 반복했던 비틀기(트위스트) 동작을 갑자기 수행해내지 못하게 된다.

역시 같은 현상을 경험했던 리우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지울리아 스타인그루버(스위스)는 2016년 한 다큐멘터리에서 “도마에서 비틀기를 할때마다 나는 내가 있는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며 “이러한 현상이 왜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멈출수도 없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체조선수들은 공중에서 비틀기나 뒤집기같은 고난도 동작을 소화한다. 불안으로 인한 신체의 이상 신호를 방치하고 동작을 강행하게 되면, 부상은 물론 심한 경우 사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해당 기사를 쓴 전직 체조선수 엘 리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로 한 바일스의 결정은 미국에서 체조가 작동하는 낡은 방식이 전환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동료들의 반응은 뜨겁다. 미국체조협회는 “바일스의 결정을 진심으로 지지하며, 그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자메이카 체조 선수인 다누시아 프란시스도 BBC에 “바일스의 결단은 모두에게 힘을 줬다. 그는 여러 면으로 가장 위대한 선수(G.O.A.T)”라고 했다.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바꾸다



미국 언론들은 바일스의 결단이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 전환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몸 상태 뿐 아니라 마음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경쟁에 적합한 상태가 아님을 인지하는 행위도 스포츠 선수의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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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일본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가 도쿄 아리아케 테니스 파크에서 열린 테니스 여자 단식 3라운드 경기를 하고 있다. 세계랭킹 2위의 오사카 나오미는 이날 체코의 마르게타 본드로소바에게 패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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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일스는 ‘올림픽 포기’라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으로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일본)를 꼽았다. 나오미는 올해 초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언론 인터뷰를 거부하고 경기에 기권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2018년 US오픈 우승 이후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공개했고, 이는 운동선수의 정신건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

오사카 나오미, “인터뷰를 거부할 권리”

바일스와 나오미의 기권은 ‘무조건 참고 뛰는 것’을 선수들의 근성으로 여기던 기존 스포츠계의 낡은 관행을 무너뜨리고 있다. '올림픽 23관왕'에 빛나는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도 "런던 올림픽 이후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밝히며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뉴욕타임스는 “팬, 기자, 리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같은 글로벌 조직이 모두 모여 골절, 뇌손상, 정신건강과 같은 선수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며 “바일스의 ‘아니오’는 그가 경쟁에서 이룰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보다 단순하고, 용기있는 저항의 행동이었다”고 했다.

개인의 결단을 넘어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PC)는 지난 23일 개막한 도쿄올림픽에 처음으로 정신의학전문가팀을 동행시킨 뒤, 선수들의 정신건강 위험도를 체크하도록 했다. 미국체조협회는 "바일스는 기권 후 추가 검진을 받으며 정신건강 회복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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