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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한국 사랑 그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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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조선일보

23일 도쿄올림픽 개회식 생중계 당시 MBC 방송 화면.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소개하며 체르노빌 원전 사진을 썼다.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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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서 일하는 커털린 푸유(33)씨가 ‘인생 영화’로 꼽는 작품은 한국 영화 ‘달콤한 인생’이다.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 열풍이 불던 지난해부터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웬만한 한국 영화는 다 섭렵했다고 한다.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돼 요즘엔 1주일에 한 번씩 한국어를 배우고 주말이면 유튜브를 보며 김치찌개 같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 ‘찐’ 한국 팬이 됐다.

커털린씨가 엊그제 “예전처럼 한국을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국 공영방송 MBC가 지난 23일 올림픽 개회식을 중계하며 루마니아 선수단이 입장할 때 대표 이미지로 드라큘라 사진을 사용한 데 이어 한국-루마니아 축구 경기를 중계하며 ‘고마워요. 마린 자책골’이라는 자막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커털린씨는 “한국에 좋은 이미지만 갖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루마니아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커털린씨뿐만 아니다. 런던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들은 우크라이나 선수단이 입장할 때 체르노빌 원전사고 사진을 삽입하고 아이티를 소개할 때 대통령 암살을 언급한 MBC의 뉴스 링크를 보내며 “이게 정말 한국 언론에서 내보낸 게 사실이냐” “사실이라면 실망”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고는 단순히 실수로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간 쌓아온 한국의 이미지를 한번에 무너뜨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CNN, BBC, 가디언, 로이터 등은 관련 소식을 주요 뉴스로 다루면서 ‘모욕적’ ‘어리석은’ ‘이상한’ 같은 단어로 한국 방송사의 사고 소식을 전했다.

외국에서 느끼는 한국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년 여성이 BBC에 나와서 “K드라마가 코로나 기간 봉쇄를 견디게 해준 힘”이라고 말하고, 젊은이들은 런던 한복판에서 K팝 커버 댄스를 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눌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건네며 반겨주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국에 조건 없는 지지와 관심을 보이고, 감사를 넘어 경외까지 느끼게 해준 그들에게 이번 사고는 엄청난 상처를 안겼다.

박성제 MBC 사장은 평창올림픽 당시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아쉽게 놓친 것과 관련해 소셜미디어에 “태극기를 들고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면서 “‘이상화 올림픽 3연패 무산' 따위의 헤드라인들은 참 짜증난다. 많은 언론이 여전히 국민 수준을 못 따라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엔 “공영방송의 공공성은 중립성, 공정성, 독립성에서 더 나아가 시대정신과 상식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국민 수준을 못 따라오는 언론이 어디인지, 시대정신은 차치하고 상식마저 저버린 언론이 어디인지 먼저 돌아봐야 한다.

[런던=이해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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