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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만화와 웹툰

성인 웹툰 그리는 여성 노동자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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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회 이효석 문학상 / 최종심 진출작 ⑤ 이서수 '미조의 시대'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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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원으로 서울 전셋집을 구하겠다고?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를 낀 반전세도 아니다. 간신히 낙성대 6평짜리 원룸을 보러 갔지만 창문만 열어도 행인들 발에 차일 것 같은 반지하다. 때마침 옆방에서 환기 장치를 타고 들어온 감자조림 냄새에 기분만 잡치고 돌아온다. 이 소설의 화자인 '미조'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해서 서울에서 쫓겨날 위기다. 잦은 이직과 퇴사로 취직도 쉽지 않다. 최근 경리직 면접을 봤으나 예상대로 연락은 오지 않고 있다. 엄마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취미 삼아 시를 쓰고 있다.

미조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수영 언니'는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피폐한 상태다. 웹툰 작가를 꿈꾸며 구로에서 일한 지 10년째. 최근에는 어시스턴트로 성인 웹툰을 그리면서 머리카락이 빠져 탈모약을 먹기 시작했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즐기는 남성이 주인공인 웹툰을 그리고 난 뒤에는 저녁마다 강가를 산책하며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문다. 왜 그만두지 않느냐는 미조의 질문에는 이렇게 반문한다. "우리 회사 영업이익률이 얼마나 높은데. 매출도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어…. IT 회사잖아, 안 그래?"

소설에서 배경이 되는 공간은 구로다. 지하철 역명이 구로공단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고, 1960년대 여공들이 가발을 만들던 공단 자리에는 '테크노타워' '포스트' '밸리' 등의 이름이 붙은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G밸리'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그 건물 안에서 땀을 흘리는 노동자의 소외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성인 웹툰을 그리는 여자 '어시'들이 한 방에 모여 태블릿PC로 그림을 그린다. 목·손목·허리 디스크를 호소하면서. 회사는 곧 병원이다.

"나는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야. 시대가 가발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가발을 만드는 거고,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거야."

이렇게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웹툰 내용이 여성을 반지하에 감금하는 등 저질로 치달을수록 괴로움도 가중된다. 결국엔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망한 것 같다"는 자조가 새어 나온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하는게 윤리적으로 싫으면서도 인정받는 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대녕 소설가는 "시대가 변했지만 노동을 제공하고 착취당하는 삶 자체는 그렇게 변한 게 없다고 말하고 있다"며 "소외계층은 스스로를 착취해 살아갈 수밖에 없고, 거주 문제 때문에도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꼼꼼하고 세밀한 묘사에 리얼리티가 빼어나다. K콘텐츠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지만 그것을 만들고 있는 노동자의 삶은 착취에 가려져 있다는 문제의식도 날카롭다. 작가는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2020년 장편소설 '당신의 4분 33초'로 제6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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