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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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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의 신화와 치유1

태초의 세상 . 또는 ‘나 ’의 존재적 시원

한겨레

신화와 자기서사 , 그리고 치유

복잡하고 험한 세상이다 . 몸과 마음을 흔드는 것들이 한가득 . 크고작은 일들에 내내 시달리며 쫓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 지친 일과 끝에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잠드는 나 . 꿈속에서도 방황은 이어져 뻐근한 심신으로 또 하루를 시작한다 .

시끄러운 내적 갈등과 쉼 없는 피로의 시대 ,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 오래 흘러온 원형적 신화들과 함께 하는 명상과 치유의 여행이다 . 한국 구전신화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신화를 서사적으로 가로지르는 가운데 깊이 잠들어 있는 내적 실존 ( 實存 )을 깨워 보고자 한다 . 누군가를 위한 일임에 앞서 , 나 자신을 향한 일이다 .

신화는 무엇인가 ? 흔히들 신화를 ‘신 ( 神 )의 이야기 ’라고 여기지만 , 정확한 답은 아니다 . 신에 관한 이야기가 다 신화인 것은 아니다 . 민담이나 소설 , 영화 같은 데도 신은 널리 등장한다 . 한편 , 신화가 다 신에 대한 이야기냐면 그것도 아니다 . 신이 아닌 인간이 주인공 구실을 하는 신화도 많다 .

신화는 ‘신성 ( 神聖 )의 이야기 ’다 . ‘신성 ’과 ‘이야기 ’가 결합하면 신화가 된다 . 신성한 이야기 , 신성에 대한 이야기 , 신성시되는 이야기 , 신성시해야 하는 이야기 , 신성을 내세우는 이야기 , 어떤 표현이든 다 어울린다 . 신성성 (sacredness)은 신화를 신화답게 하는 핵심 요소다 .

그렇다면 신성이란 무엇일까 ? 이에 대한 답은 다양하다 . 누군가는 신성을 높고 먼 곳에 있는 초월적 섭리나 권능으로 보며 , 누군가는 바깥이 아닌 우리 안의 힘이나 가치에서 신성을 찾기도 한다 . 그런가 하면 신성을 종교나 권력 , 자본이 만든 허상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 내 생각을 묻는다면 , 신성은 그 모두일 수 있다고 답하겠다 . 고귀한 근원적 섭리와 힘으로서의 신성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 진짜 신성 외에 허튼 도취로 삶을 파괴하는 가짜 신성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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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힘이 세다 . 그것은 재미 삼아서 스치고 지나가는 무엇이 아니다 . 최고의 집중력으로 깊이 스며들어서 일체감을 체현하는 것이 신화의 방식이다 . 가짜 신화가 아닌 진짜 신화에서 , 이야기 주인공은 외적 타자를 넘어서 ‘또 다른 나 ’로서 의의를 지닌다 . 근원적인 나이고 존귀한 나다 . 나보다 더 소중한 나 . 그와의 서사적 합치를 통해 사람들은 신령한 존재로서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한다 . 미력함과 무의미함을 넘어서는 본원적인 치유 과정이다 .

문학치료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 한국에서 생겨나서 쭉쭉 성장중인 토착 학문이다 . 문학치료학에서는 인간이 곧 문학이라고 말한다 . 인간의 이면적 심층에 삶을 움직여가는 이야기가 있다고 본다 . 삶의 과정이란 곧 그 이야기의 발현 과정이다 . 그 이면적 이야기를 문학치료학에서는 ‘자기서사 ’라고 일컫는다 . 사람들의 자기서사는 저마다 같고도 다르며 , 크고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 인간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삶의 근본적인 치유를 이루려면 자기서사를 제대로 투시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

문학치료학은 구전설화를 자기서사 진단과 조정의 기본 통로로 삼고 있다 . 오래 흘러온 원형적 이야기들은 존재의 이면을 비춰주는 힘이 있다 . 일컬어 , 마법의 거울 . 그 중에도 신화의 자리는 특별하다 . 근원적인 신성의 이야기로서 신화를 통해 우리는 저 밑바탕의 뿌리로 돌아가 참자아와 만날 수 있다 . 신화가 곧 나의 이야기임을 자각하고 신령한 서사를 오롯이 체현할 때 , 우리 삶의 지평은 새롭게 열릴 수 있다 . 홀연히 하늘과 땅이 열리던 그 순간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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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바다와 태초의 알 , 그 존재론적 의미

‘태초 ( 太初 )’라고 불리는 아득한 옛날 , 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 이 원초적인 물음에 대해 세상의 많은 신화들은 여러 가지 답을 전한다 . 그 사연이 각 신화의 첫머리를 이루는 것이 상례다 . 구체적인 내용은 가지각색으로 차이가 나지만 , 기본 사유가 서로 통하는 점도 있다 .

여러 신화에 그려진 태초 세계의 형상을 주요 단어로 표현하면 고요와 적막 , 혼돈과 미분 ( 未分 ), 알 [ 卵 ], 물과 불 , 어둠과 밝음 , 흐름과 타오름 등을 들 수 있다 . 구체적 형상이 없는 아득한 무정형의 세계이면서 , 뭐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생명적 에너지와 창조적 역동이 내재한 세계다 .

인류 최초의 신화라 일컬어지는 수메르 신화는 태초에 바다가 있었다고 말한다 . 하늘의 신 안 (An)과 땅의 여신 키 (Ki)가 모두 바다의 신 남무 (Nammu)로부터 태어난다 . 하늘과 땅 이전 , 태초의 바다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아득한 무정형의 흐름과 출렁임이다 . 어둠과 고요 속에 생명의 기운을 내포한 .

수메르를 잇는 바빌론 신화에서도 태초에는 오직 물뿐이었다고 한다 . 민물의 신 압수와 짠물의 신 티아마트가 공존했는데 둘 다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이때 뱀이 나타내는 것은 원초적인 생명적 에너지와 운동성이다 . 하늘과 땅은 바다의 신 티아마트로부터 탄생하게 된다 . 하늘과 땅을 그 안에 품고 있는 태초의 바다 . 눈을 감고서 그 모습과 기운을 찬찬히 음미해 볼 일이다 .

이집트 신화에서도 태초에 어둡고 고요한 물의 세계만이 있었다고 한다 . 태초의 큰 존재 눈 (Nun)은 원시의 바다를 상징하는 신이었다 . 그 물속 깊은 곳에 태양신 레 (라 ; Ra)의 영혼이 누워 있었다 . 그가 눈을 뜨고 움직이면서 태양이 떠오르고 여러 자연신이 생겨나게 된다 . 바람의 신 슈와 비의 신 테프누트 ,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 등이 그들이다 . 땅과 하늘에 앞서서 태양과 비와 바람을 품고 있는 태초의 바다 , 그 역동성이 마음을 잡아끈다 .

태초 우주의 형상에서 물과 함께 주목할 것은 알의 이미지다 . 몽골신화는 태초의 바다에 거대한 새 가릉빈가가 둥지를 틀고서 낳은 알로부터 세상 만물이 나왔다고 한다 . 타히티 신화에서는 태초에 하나의 알뿐이었다고 한다 . 알이 영겁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회전하던 중 타아로가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동시에 창조는 시작된다 . 위로 올려진 알 껍질은 하늘이 되고 , 바수어진 조각들은 바위와 모래가 되는 식이다 .

중국 신화에도 태초의 알이 등장한다 . 어둠 속에 둥둥 떠다니는 알이 있었고 , 그 안은 혼돈이었다 . 거인신 반고가 그 속에서 1만 8천년 동안 잠든 상태로 자라난 끝에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는 것과 창조의 역동이 펼쳐진다 . 알 속에 내재해 있던 밝은 기운과 어두운 기운이 갈라져 하늘과 땅이 된다 . 반고는 그들이 다시 붙지 못하도록 땅에 발을 딛고 팔로 하늘을 떠받치게 된다 . 그렇게 세상은 시작된다 .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갸륵한 생명의 세상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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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 그럼에도 이를 되짚어보는 것은 그 신화적 이미지 속에서 인류의 자기서사의 원형을 보기 때문이다 . 신화가 말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 이 세계의 탄생이지만 , 헤아려보면 인간 생명의 탄생이 그와 다르지 않다 . 저 태초의 형상 속에 인간의 존재적 시원이 담겨있다는 뜻이다 .

생각해 보라 .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숨을 내쉬기 전 , 우리는 어떤 모습 어떤 상태였을까 ? 어머니의 자궁 속은 하나의 어둡고 고요한 바다 같은 곳 아닐까 ? 원생명을 품은 채 일렁이는 . 또는 그것은 하나의 알 같은 곳 아닐까 ? 유일하고 거대한 . 그 속에서 잠자며 자라나는 나의 생명 ! 반고신화는 그 시간을 1만 8천년이라 했지만 , 그 이상으로 아득한 무엇일 터다 . 타히티 신화가 말하는 ‘영겁 ’이 어울린다 . 그 태초의 바다로부터 , 태초의 알로부터 내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우주는 시작된다 . 신이 어찌 멀리 있을까 . 내가 바로 그것이다 .

어찌 어머니의 자궁부터일까 . 우리의 생명적 시원은 , 또는 서사적 시원은 더욱 멀고 깊다 . 우주의 탄생을 꿈꾸며 생겨남과 사라짐을 거듭하는 수십 수백의 난자와 수억 수십억의 정자들 . 또는 그들이 있기까지의 헤아리기 어려운 창조적 조화의 시간들 . 태초의 바다나 태초의 알에서 , 또는 태초의 혼돈에서 나는 그것을 본다 . 그리고 헤아려본다 . 지금 이렇게 땅을 딛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존재의 의미를 . 내가 ‘레 ’이고 타아로가다 . 내가 반고다 . 하늘을 떠받치며 자라나는 일 , 기꺼이 감수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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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원천으로서 카오스 , 또는 대극

반고가 깃들어 있던 태초의 알은 혼돈의 세계였다고 한다 .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의 미분화 상태 . 그 혼돈의 서양식 명칭은 카오스 (Chaos)다 . 그리스 신화는 모든 것이 카오스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 생명적 에너지가 가득한 원 ( 原 )우주나 선 ( 先 )우주로 봄이 어울린다 . 그로부터 대지의 신 가이아 (Gaia)가 탄생하고 또 밤의 여신 뉙스와 어둠의 화신 에레보스가 생겨났으니 카오스는 신령한 원생명의 장 ( 場 )이었음이 분명하다 .

북유럽 신화는 태초의 카오스를 상반된 기운이 대극적으로 도사린 형상으로 표현한다 . 얼음과 탁한 안개로 덮인 암흑의 땅 니플헤임의 맞은편에 모든 것을 줄줄 녹이는 뜨거운 불의 땅 무스펠이 있다 . 긴눙가가프라는 공허로 나뉘어 있던 두 땅이 서로 만나면서 창조는 시작된다 . 모든 거인의 조상 이미르와 거대한 암소 아우둠라가 탄생하며 , 그들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또다른 생명들이 만들어진다 . 일련의 창조 과정은 ‘격렬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역동적이다 .

대극의 기운이 만나서 태초의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은 이란이나 뉴질랜드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 이란 신화에서 진공을 사이에 두고 양립하는 밝음과 어둠의 공간은 오르마즈드와 아흐리만으로 불린다 . 어느 땐가 두 세계의 힘이 만나서 부대끼는 가운데 세상 만유가 탄생한다 . 뉴질랜드 신화에서 대극의 존재는 아버지인 하늘 랑기와 어머니인 대지 파파다 . 둘은 암흑 속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고 하니 , 그 또한 카오스라 할 수 있다 . 자식들에 의해 둘이 떼어지면서 세상은 새 체계를 갖추게 된다 .

태초의 카오스나 대극 상태는 우리 자기서사의 또 다른 원형을 현시한다 . 하나의 생명으로 화하기 전 , 세상은 아득한 혼돈이고 부딪침이었다 . 상반된 거대한 원초적 기운이 맞물려 부대끼는 속에서의 가없는 발버둥 ! 그 영겁의 역사 끝에 비로소 생명은 형체를 갖게 된 터다 . 그렇다 . 나의 생명이라는 우주는 저절로 생겨난 바가 아니다 . 그것은 가열찬 투쟁의 결과물이다 .

그렇다면 한국 신화는 어떠한가 ? 구전으로 이어져온 창세신화의 서사는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 <창세가 >는 태초에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 그것을 가른 것은 하늘 땅과 함께 생겨난 거대한 신 미륵이었다 . 그가 천지를 가른 뒤 땅의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자리 잡게 된다 . 태초에 고귀한 신 미륵이 있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신성한 생명의 공간임을 말해준다 . 그 신령한 조화를 통해 카오스가 코스모스 (cosmos)로 바뀐 상황이다 .

하나로 붙어있던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중국 여러 민족의 신화와 뉴질랜드 신화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 하늘과 땅 사이에 기둥을 세웠다는 내용도 중국 좡족이나 아즈텍 신화 등에서 볼 수 있다 . 이에 대해 제주도 창세신화 <초감제 >는 태초 세상에 대한 하나의 특별하고 인상적인 내용을 전한다 . 카오스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 일컬어 , 천지혼합 ( 天地混合 )! 애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

하늘과 땅이 뒤섞여 있다는 것은 둘이 맞붙어 있다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현시한다 . 밝음과 어둠 , 맑음과 탁함 , 높음과 낮음과 같은 어떤 종류의 분간도 없는 상태이니 완전한 혼돈이다 . 대극의 기운이 무정형으로 섞여서 흐르니 그 에너지가 어떠했을까 . 아득한 고요와 혼돈 속에 무한의 역동이 전방위로 펼쳐졌을 것이다 . 그 역동은 천지의 분리를 통한 우주의 탄생으로 귀결된다 . 신화는 거인신에 의해 하늘과 땅이 갈라지자 하늘에 흑이슬 , 땅에 청이슬이 피어나고 중간에 황이슬이 피어나 오색구름이 세상을 채웠다고 한다 . 선우주의 원생명적 기운이 새 우주의 가시적 생명력으로 화한 모습이다 . 억겁의 역동 속에 태어난 태초의 이슬 , 아름답다 ! 감동적일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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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서 아득한 과거 , 천지혼합 시절을 반추해 본다 .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면서 그 모두였던 무엇 …… . 우리의 존재적 시원이자 본향이다 . 그 속에 본원적인 내가 있다 . 나는 그 이미지를 혼란이나 갈등으로 보지 않는다 . 고요 속에서 펼쳐진 갸륵한 창조적 몸짓으로 사유한다 . 하나의 신령한 산고 ( 産苦 )로 .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생명적 조화는 천지가 분리된 뒤에도 그치지 않는다 . <창세가 >에서 미륵은 왜 하늘과 땅 사이에 기둥을 세운 것일까 ? 둘이 다시 붙어서 하나가 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 왜냐하면 본래 하나였으므로 . 기둥에 의해 분리됐지만 , 둘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 하늘은 땅을 향해 빛과 볕을 내리고 비와 눈을 내린다 . 땅은 하늘을 향해 기운을 올려보내고 초목을 키워낸다 .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나 , 두 기운을 함께 받으며 움직인다 . 밝음과 어둠이 , 기쁨과 슬픔이 내 안에 공존한다 .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 아니 신적 섭리다 . 기꺼이 받아들이고 펼쳐내야 할 .

우리가 온 곳과 돌아갈 곳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 원생명에서 현생명으로 . 그렇게 세상은 만들어졌다 . 그것으로 끝인가 하면 그럴 리 없다 . 모든 것은 원상태를 향해 움직인다 . 지금 떨어져 있는 하늘과 땅은 어느 날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 그리고 이 세상은 까뭇 닫힐 것이다 . 우리가 ‘죽음 ’이라고 부르는 그 날에 . 북유럽 신화가 말하는 라그나로크는 , 세계 종말의 날은 허튼 상상이 아니다 .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맞이할 현실이다 .

하지만 그것은 , 끝이 아니다 . 돌아감일 따름이다 . 우리가 온 그곳 , 아득한 원생명의 세계로의 . 그 아득한 고요와 혼돈의 시공간 속에서 갸륵한 생명적 몸짓은 다시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 또 다른 영겁을 향해서 . 현실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 신화의 시간은 영원하다 .

이렇게 쓰고 있지만 , 죽음은 아득한 일이다 . 그 돌아감 뒤의 일을 우리는 알 수 없다 . 하지만 존재적 바탕으로의 돌아감은 죽음만의 일은 아니다 . 우리는 저 밑바탕으로의 침전을 통해 , 예컨대 깊은 명상 ( 冥想 )을 통해 태초의 원생명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 창조신화의 원형적 서사와 이미지는 나의 본래적 존재성을 추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명상 통로다 .

오늘 밤 ,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뒤척이는 대신 신화를 품어 보면 어떨까 . 마음을 끄는 신화적 이미지를 , 예컨대 태초의 바다나 태초의 알 , 천지 혼합의 역동과 지상의 첫 이슬 등을 저 멀리 끝간 데까지 곱씹어 느끼면서 잠의 평화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 돌아오는 새벽 , 어쩌면 그대는 새로운 우주와 함께 눈을 번쩍 뜨는 신화적 기적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

신동흔/건국대 국문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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