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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중근 칼럼]2002 대선의 기억, 그리고 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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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2일 대통령 선거가 선관위 예비후보 등록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된 첫 달, 시민의 가슴은 답답하다. 후보들이 미래 담론을 놓고 경쟁하는 모습은 없이 퇴행적 행태만 도드라지고 있어서다. 야당의 유력 후보들은 정권교체 여론을 업고 반문재인만 외치면 다 될 듯이 행동한다. 윤석열과 최재형은 준비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일반 시민보다 못한 수준의 원칙론만 외치고 있다. 간혹 무엇을 하겠다는 말은 하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까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여당 주자들의 적통 논쟁과 지역주의 논쟁은 또 어떤가. 정책을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야당보다는 낫지만, 시대의 엄중함과 닥친 과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여야 모두, 시민의 수준을 우습게 보는 듯한 행태에 모욕감마저 느낀다.

경향신문

이중근 논설주간


최근 대선판을 보면서 2002년 대선을 떠올렸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세 아들의 비리와 대북송금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정권을 다 잡은 듯 행세했다. 1997년에 이어 대선 재도전에 나선 ‘대쪽 판사’ 출신 이회창이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이었다. 속으론 대세론에 갇힌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시민들의 변화와 개혁 욕구를 읽지 못했다.

여당에서는 DJ 가신그룹인 동교동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인제의 당선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 돌풍이 시작되자 이인제는 무리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울산에 이어 광주에서 일격을 당하자 “어느 정치인의 지지율이 2주도 채 안 돼 30% 올랐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반발했다. 노무현이 크게 이긴 광주 경선 결과 발표를 듣고 현장에서 상기된 노무현의 표정과 충격을 받고 허공을 쳐다보는 이인제의 엇갈린 반응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인제는 바로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대전 유세에서 “대한민국에 전라도만 있습니까. 호남만 있습니까”라고 외쳤다. 대전·충남에서 몰표가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 반발하며 김중권 후보가 사퇴하자 그는 다시 음모론을 제기했다. 김 후보가 영남 표를 갈라먹지 못하면 노무현이 유리해진다며 당원들을 향해 중대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놨다. 여기에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향해 제기한 색깔 논쟁까지 증폭시켰다. 보수색이 강한 강원도에서는 밤중에 노무현을 비난하는 빨간 딱지들이 나붙었다. 민주당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두 개의 금기를 깬 것이다.

이후 정몽준과의 단일화, 그리고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 등을 이겨내고 노무현은 당선됐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선도 마찬가지다. 2002년과 2022년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외양일 뿐 내재된 조건은 다 다르다. 중요한 것은 선거판을 흔드는 시대정신과 당대의 동인들, 그리고 후보들의 작용·반작용이다. 그사이에 촛불혁명과 박근혜 탄핵이 있었다. 시민의 눈은 더욱 밝아지고, 마음은 더 냉정해졌다. 지금 문재인 정권을 향하는 화살에는 박근혜 탄핵이라는 독이 묻어 있다. 박근혜, 문재인 두 정권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시민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정권교체에 대한 높은 지지율의 근원이다. 이것을 가볍게 여기면 여권은 이번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여권을 옭아맨 내로남불 프레임이 여전히 견고하다.

2002년 대선 결과를 이끌어낸 시대정신은 지금껏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36세의 0선 이준석을 보수당의 대표로 밀어올린 에너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최근 야당 지지율이 빠지는 것을 보면, 그 에너지는 야당 쪽에만 유리하게 고정돼 있지 않다. 2002년 대선 전날 밤 정몽준이 지지 파기를 선언하던 순간, 노무현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선일까지 남은 7개월 반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변화무쌍했던 2002년 대선 양상이 이번에 재연될 수 있다. 지각 아래 맨틀 층에서 조용히 흐르는 그 에너지가 언제 판을 흔들지 모른다. 남의 약점이나 말꼬리를 잡고 헐뜯을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제가 해내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였다.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제시하고 설득력 있는 실행 방안을 내놓으라. 나머지는 시민의 몫이다. 다른 후보들이 두루뭉술한 원칙론을 말할 때 어떻게 하겠다는 실행 방안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면 시민은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시민은 20년 전보다 더욱 믿을 만하다.

이중근 논설주간 harub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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