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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기 대신 물통 들었던 소녀, 도쿄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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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별] 역도 디아스, 필리핀 사상 첫 金

가난한 집안 6남매 중 다섯째 “역도는 내게 곧 생존이었다”

부상 딛고 리우 銀 이어 또 메달… 필리핀 정부, 7억 포상·집 선물

조선일보

코로나로 체육관 문닫자 물통 훈련 - 필리핀의 하이딜린 디아스가 대나무 막대에 물통 2개를 달아 만든 역기로 훈련하고 있다. 지난해 말레이시아로 전지훈련을 갔다가 코로나 사태로 체육관 출입이 통제되자 임시로 ‘물통 역기’를 만든 것이다. 디아스는 이 모습을 담은 영상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바벨이 없어도 문제없어. 대나무 막대랑 큰 물통 두 개만 있으면”이라고 썼다. /하이딜린 디아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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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일본 도쿄 국제포럼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역도 여자 55㎏급 A그룹 경기. 중국 선수 랴오추윈(26)이 용상 마지막 시도에서 126kg을 들어 올렸다. 대회 최고 기록이었다. 뒤이어 나온 필리핀의 하이딜린 디아스(30)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선 본인이 평소 들었던 무게보다 2㎏ 더 무거운 127㎏을 성공해야 했다.

키 150㎝의 디아스는 잠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바벨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바벨을 내려놓자마자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인상 97㎏, 용상 127㎏으로 합계 224㎏을 들어 올린 디아스는 강적 랴오추윈을 꺾고 올림픽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필리핀이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1924년 이후 97년 만에 첫 금메달이 나온 순간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디아스는 11세 때 정식으로 역도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우물에서 물을 길어 40리터쯤 되는 무거운 물통을 들고 하루 수백 미터씩 걸어다녔다고 한다. “무거운 물통을 더 효과적으로 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죠. 역도 원리와 비슷하지 않나요?” 동네에서 장난 삼아 남자 아이들과 나무조각, 자동차 휠, 시멘트 블록 따위를 들며 경쟁하다가 소질을 발견했다.

올림픽 도전은 쉽지 않았다. 디아스의 첫 올림픽은 열일곱 살 때 나선 2008년 베이징이었다. 58kg급으로 두 번 올림픽을 치렀지만 메달은 없었다. 2014년 무릎 부상 탓에 체급을 바꾼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역도는 나에게 그냥 생존”이라며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2016 리우에서 53kg급 은메달을 따냈고, 이번엔 55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58kg급으로 경기할 때는 인스턴트 음식, 불량 식품만 먹었다. 무릎 부상을 겪은 뒤로 건강식을 시작했더니 체중이 줄면서 몸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코로나도 디아스의 도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 전지훈련을 떠난 말레이시아에서 코로나 확산 사태로 체육관 출입이 통제돼 역기를 들지 못했다. 어린 시절 물통 나르던 기억이 떠올랐을까. 디아스는 대나무 막대에 커다란 물통 두 개를 매달고 연습에 돌입했다. ‘물통 역기' 드는 영상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바벨이 없어도 문제없어. 대나무 막대랑 큰 물통 두 개만 있으면. 힘들지만 여전히 가슴에 꿈을 품고 산다”고 썼다.

이번 도쿄올림픽 경기 중에도 디아스는 인상 찌푸리는 다른 역도 선수들과 달리 바벨을 내려놓고 방긋방긋 웃었다. 미 뉴욕타임스는 “디아스는 계속 미소를 유지했고, 결국 마지막에도 웃었다”고 전했다.

목에 걸린 금메달을 쓰다듬으며 “믿을 수 없다”고 말한 디아스는 이제 필리핀의 영웅이자 희망이다. 필리핀 정부와 기업들은 그에게 포상금 3300만페소(약 7억5000만원)와 함께 집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소셜 미디어엔 디아스가 대나무를 들고 아이들에게 역기 드는 법을 가르치는 봉사활동 사진도 퍼지고 있다. “디아스는 금메달뿐 아니라,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한 황금 같은 마음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다. 디아스는 “필리핀 젊은이들에게 ‘당신도 금메달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고, 결국 이뤄냈다”고 했다.

[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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