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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비판 언론에 간첩 낙인... 총선 앞둔 푸틴, 탄압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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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매체 4개·언론인 18명을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해 탄압

가디언 “독립언론에 대한 사형선고”

조선일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16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주러시아 대사 신임장 제정식에서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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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개헌으로 사실상의 종신 집권 토대를 굳건히 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저인망식 야권 탄압에 나서고 있다. 특히 자신의 최대 정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등 주요 반(反)체제 인사에 대한 숙청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정부 비판 언론에 ‘간첩’ 낙인을 찍고 줄줄이 퇴출시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최근 “푸틴이 종신 집권을 위한 단 하나의 변수도 남기지 않으려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통신·미디어 감독 기구인 ‘로스콤나드조르’는 26일(현지 시각) 푸틴에게 비판적인 활동을 해 온 ‘반부패재단’ 등 나발니 조직과 연루된 웹사이트들을 차단했다고 밝혔다. 나발니 측에 따르면 이날 차단된 웹사이트만 49개에 이른다. 로스콤나드조르는 “검찰의 요청에 따라 이날부터 나발니 관련 정보물들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고 했다.

앞서 지난달 모스크바 법원은 나발니의 반부패재단과 그 후신인 시민권리보호재단에 대해 정치 불안·선동 등의 혐의를 씌워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 활동을 중단시키고 관련자들의 차기 선거 입후보를 금지했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종신 집권 개헌 후 치러지는 첫 중요 선거를 앞두고 푸틴이 정적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고 평했다 .

이날 조치로 푸틴의 20여 년에 걸친 주요 정적 숙청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푸틴은 2003년 야당 자유러시아당을 이끌던 세르게이 유센코프를 비롯해 석유 재벌 보리스 베레좁스키(2013년)와 부총리 출신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2015년) 등을 차례로 암살하며 정적들을 제거했다. 유일하게 남은 나발니도 작년 8월 독극물 노비촉으로 독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감옥에 가두고 관련 조직의 손발을 묶는 방식으로 정치적 사형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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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 아내 율리아를 향해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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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들이 제거된 후엔 반정부 언론과 재야 시민 활동가들만 남게 됐는데, 푸틴은 최근 이들에게도 숙청의 칼끝을 들이대고 있다. 러시아 법무부는 23일 자국의 반정부 성향 온라인 탐사 매체 디인사이더를 ‘외국의 대리인(foreign agent)’ 목록에 추가했다. 2013년 러시아 반체제 언론인들이 만든 디인사이더는 작년 8월 나발니 독살 미수 당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암살 요원들에게서 범행 증언을 직접 확보, 폭로해 푸틴 정권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린 매체다.

“러시아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해외 검은돈을 받고 있다”는 명목이지만, 구체적 혐의는 적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목록에 오르면 모든 콘텐츠에 ‘외국 대리인’ 표지를 달고, 분기별 금전 거래를 낱낱이 당국에 밝혀야 한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 목록에 러시아 언론인 18명과 메두자·V타임스 등 반정부 매체 4개가 이름을 올렸다. V타임스는 지정 후 단 3주 만에 폐간했다.

이 조치에 대해 모스크바타임스는 “광고 수입 감소와 각종 제한 조치로 러시아 내 활동은 사실상 금지나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가디언은 “독립 언론들에 대한 사형 선고”라고 했다. 소규모 반정부 단체·연예인 등에 대한 탄압도 강화해 망명길에 오르는 이들이 줄줄이 많아지고 있다고 모스크바타임스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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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푸틴은 자신의 임기를 84세가 되는 오는 2036년까지 늘릴 수 있는 개헌에 성공하며 종신 집권의 제도적 길을 마련했다. 2000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푸틴은 3연임 제한에 막혀 2008~2012년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실권형 총리를 지냈다. 2012년 다시 대통령에 선출된 그가 2036년까지 통치를 이어가면, 31년간 소련의 통치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을 뛰어넘는 20세기 최장 군림 러시아 통치자가 된다.

독주 체제를 이미 공고히 했음에도 야권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건 작은 권력 균열에서도 반정부 움직임이 확산할 수 있음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 통합러시아당의 지지율은 코로나 실정 책임론으로 지난 3월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의 조사에서 27%를 기록, 8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여권에 코로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올해 초 나발니 석방 요구 시위가 터져 나오면서 전국적인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푸틴은 하반기 치러지는 각지의 자잘한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서도 모든 조직력을 동원하고 있다. 러시아 탐사 취재 신문 ‘노바야 가제타’ 등에 따르면 각 지역 유력 야당 후보 출마를 막기 위해 각종 방해 공작이 펼쳐지고 있다. 유로뉴스는 “평생 집권을 꿈꾸는 푸틴의 노파심 속에 지방·언론·재야 반정부 인사들이 전방위적 탄압을 겪고 있다”고 평했다.

[임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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