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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반도체 인력만 매년 1,500명 '구멍'···"新 10만 양병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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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리셋 더 넥스트]

<3>노동의 개념 바뀐다 - 글로벌기술戰, 인재양성 절실

배터리분야 설계·공정인력도 2,800명 이상 태부족

美·英 등 선진국은 장학금·재단 통해 인재 빨아들여

정부 정책 시야 넓히고 인센티브 발굴 적극 나서야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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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은 울리지 않지만 파괴력만큼은 통상적인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술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국 역시 반도체와 배터리를 시작으로 차세대 통신, 인공지능(AI), 로봇 등 여러 분야에 참전해 생존을 위한 경쟁을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전장에 뛰어든 기업들은 지속적인 인재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최고경영자(CEO)까지 엔지니어 등 기술 인재 영입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전력(戰力) 확보가 절실한 기업의 현 상황을 반영한다.

최근 LG와 SK 등 주요 대기업들이 세계시장에 포진해 있는 배터리 분야는 ‘인력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봐도 좋을 만큼 연구개발(R&D)과 생산관리 분야 인력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 1위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은 오는 9월 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배터리 R&D를 해온 석·박사나 박사후과정(포스트닥터) 연구원을 대상으로 최고 경영진과의 대화를 진행할 계획이다. 회사의 R&D 비전을 소개하고 조직 문화와 인사 제도를 설명하는 이 행사에서는 채용 상담도 함께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현 대표이사 사장과 김명환 사장, 김흥식 최고인사책임자 등 회사 핵심 경영진이 코로나19로 한층 까다로워진 국경의 벽을 넘어 미국을 향한다는 점에서 핵심 인력에 대한 기업의 집념이 드러나는 행사이기도 하다.

경쟁사인 SK이노베이션도 이에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는 회사 공식 행사에서 “배터리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인력 블랙홀이 됐다”며 생산 인력과 연구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곧 기업의 명운을 가르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뛰어난 인재 채용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며 R&D 인력 수시 채용에 힘을 쏟는 모습도 관찰된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인 삼성전자도 초격차 기술의 배경에는 인재가 있다고 보고 인력 네트워크를 풀가동해 R&D 연구진을 영입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주춤한 상태지만 예전에는 고위 임원들이 미국으로 출장을 갈 경우 박사 또는 박사후과정을 밟고 있는 기술 인재를 연구실로 직접 찾아가 발굴해오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고위 임원의 한 해 성과를 평가하는 항목에 인재 발굴에 관한 내용이 있었을 정도로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거는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유별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국내에서는 필요한 규모의 인력을 충분히 뽑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공계 인력을 양성하고 석·박사 과정 연구생을 이끌어줄 수 있는 교수들까지 탄탄하게 확보하는 것은 한두 기업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배터리 분야의 경우 지난해 기준으로 석·박사급 연구 및 설계 인력이 1,000여 명, 학사급 공정 인력도 1,800여 명이 부족한 상태이며 반도체 역시 해마다 1,500명 이상을 충원해야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통계가 있다.

반면 한국과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는 세계 주요국들은 일찌감치 기술 인재 확보를 위해 자본을 무기로 꺼내 들었다. 전 세계 R&D 인력이 모여든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은 1946년에 만들어진 ‘풀브라이트 장학금’이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다. 게다가 반도체·배터리·AI 등 유망 산업의 기반이 이미 갖춰져 있는 만큼 기술 인재들이 유학을 갔다 눌러앉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자신들의 문화에 친숙한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1902년부터 창설돼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으로 알려진 영국의 로즈 장학금, 1953년부터 현행 체제와 유사한 선진 연구 지원 사업을 펼친 독일의 훔볼트재단 장학 프로그램 등은 각각 영국과 독일로 전 세계 인재를 끌어오는 자석 역할을 해왔다. 글로벌 인재를 대상으로 한 장학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한 한국도 2010년 글로벌 인재 교류 프로그램인 글로벌 코리아 스칼러십을 만들고 지원에 나섰지만 역사가 짧아 기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인재를 양성해내는 데는 아직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민관 협력을 통해 해외의 우수한 두뇌를 유치하는 ‘신(新)10만양병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율곡 이이가 주창했던 10만양병설의 개념을 차용한 이 주장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저서에서 언급하며 주목받았는데,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수준 높은 인력과 자본을 한국으로 끌어들여야 하며 인재 역시 국내뿐 아니라 외국 인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외국의 기술 인재를 확보하려 할 때 재외동포 등 혈연을 매개로 접근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어 정책적 시야를 넓히고 인재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산업 혁신 인재 2만 3,000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비롯해 인력 양성을 위해 2,442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해외 기술 인재를 포섭하겠다는 설명은 들어 있지 않았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상대적으로 기술 이민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던 독일이나 일본·영국 등도 정보기술(IT) 인력 확보와 4차산업 기반 마련을 위해 2000년대 중반부터 빗장을 풀고 고급 인재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며 “기업이 모셔오려는 외국의 기술 인재가 한국에서 활동하기 수월하게 정책적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수민 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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