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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아침햇발] 통일부에 대한 ‘박정희-이준석’ 가상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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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69년 3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토통일원 개원식에서 개원 연설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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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 논설위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6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없애자고 하는 통일부는 박 전 대통령이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은 1963년 11월 제6대 총선을 앞두고 ‘국가기구로서 국토통일연구기관을 두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제6대 국회가 개원하자, 공화당이 주도해 국회에 국토통일연구특별위원회를 꾸렸다. 이 위원회는 1967년 1월 활동 보고서인 <통일백서>를 발표해, 국무위원(장관)이 장을 맡는 통일 문제 전담기구를 정부 조직으로 두자고 건의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국토통일원(통일부 전신)을 출범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 개원 연설에서 통일부가 왜 필요한지, 통일부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연설문을 읽어보면, 마치 52년 뒤 이 대표가 꺼낸 통일부 폐지론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답변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통일부 폐지론에 대한 ‘박정희-이준석 가상 문답’을 꾸며봤다. 이 대표의 질문은 언론 인터뷰 등을 근거로 구성했다. 박 전 대통령의 답변은 연설문에서 따왔고 일부는 <통일백서>에서 인용했다.

―외교 업무와 통일 업무가 분리돼 있어 비효율일 수 있다. 실질적으로 역할과 실적이 모호한 통일부가 부처로 존재할 필요가 있나?

“(국토통일원이 있기 전) 통일 문제를 정부 여러 기구에서 부분적으로 또는 단편적으로 다루어 왔지만 체계 있는 업무가 되지 못했다. 외무부, 외무 장관 직속 하의 외교연구원, 헌법기관인 국가안전보장회의, 중앙정보부, 공보부 조사국 제3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이북 5도청, 한국반공연맹 등이 통일 문제를 연구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통일 문제는 이들에게 부수적인 업무에 불과했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서 제기되는 필요성에 의한 단기적이고 일회적인 정책만을 생산할 뿐 통일에 대한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정책의 생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토통일원이 개원함으로써 통일 문제를 전담하고 종합적인 정책 추진이 가능하게 됐다.”

―우리 말고 다른 분단국에도 통일부 같은 조직이 있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중국·월남 등과 우리나라를 비교해볼 때, 그들은 민족 통일을 성취하려고 그들 특유의 환경에 따른 통일 문제 기구를 설치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이런 나라들은 통일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하고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통일 문제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미온적이고 고식적인 대북 태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통일 문제의 제1차적 작업인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연구를 담당할 수 있는 기구가 아직껏 설치되지 못했다.”

―통일부를 둔다고 통일에 특별히 다가가지도 않는다.

“물론 (국토통일원이 있다고) 당장 통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문제가 논의되고 결정이 나왔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실천이나 집행에 옮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통일 문제는 어디까지나 장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어떤 과수 나무를 심어서 그 나무에서 과실을 따 먹기 위해서는 오랜 시일 동안 비료를 주고 관리를 잘 해서 몇년 후에는 반드시 그 나무에서 훌륭한 열매가 여는 것을 기다리는 거와 마찬가지 심경이다. 우리는 지금 통일이라는 과수 나무의 묘목 관리와 가꿈을 잘함으로써 설령 우리 세대에 과일을 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들 다음 세대에 반드시 딸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여건을 갖추어나가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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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 개원식에서 부처 이름이 적힌 현판을 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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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대표는 “남북관계는 통일부가 아니라 보통 국가정보원이나 청와대에서 바로 관리했다”며 통일부 무용론을 주장했다. 1970년대에도 있던 주장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적십자회담 등 1970년대 이뤄진 굵직한 남북대화는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 1976년 10월 국회 예결위에서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신상우 의원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통일원인데 장관은 일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가고 통일원을 국으로 격하시킬 용의는 없는가”라고 유상근 통일원 장관에게 힐난조로 물었다. 유상근 장관은 정부조직법을 인용하여 통일원의 직무를 설명한 뒤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미미한 것같이 보이나 통일원을 없앤다면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최근 통일부 폐지 논란에서 오간 이야기들과 비슷하다. 1980년대에도 ‘통일원은 뭐하는 부처냐’는 무용론이 계속 나왔지만, 노태우 정부는 1990년 통일원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켰다. 통일부를 만들고 확대한 박정희·노태우 정부는 거슬러 올라가면 국민의힘의 뿌리다.

박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 협력에 대한 원대한 구상이 있어 통일원을 만든 것은 아니다. 남한에서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억눌린 민간 통일논의가 다시 일기 시작했고, 북한은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만들어 대남 통일공세를 강화했다. 당시 데탕트 국면 등 국제 정세도 급변해 박 전 대통령은 그동안 금기시해온 통일 문제를 통일원을 통해 불가피하게 공론화해야 했다. 1970년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참모들이 남북대화를 검토하자 대검찰청에서는 “북한과의 대화 검토 자체만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감”이라고 반발했다. 이런 내부 반발을 의식해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첫 남북대화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적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의 한쪽 손을 붙들고 있으면 그가 나를 칠지 안 칠지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다.” 박 전 대통령이 52년 전 통일원을 만든 과정을 이 대표도 헤아렸으면 좋겠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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