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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식품 유통기한 폐지, 소비자 안전은 누가 책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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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윤희훈 기자




“대기업 매장은 소비기한이 도입되더라도 상품 회전율이 높아 장기 재고 상품을 구입할 일이 거의 없을 거에요. 변상 등 보상도 잘 처리해주는 편이고요. 문제는 회전율이 낮은 중소형 매장이죠.”

소비기한 표시 제도 도입에 대한 국내 한 유통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식품에 ‘유통기한' 대신 ‘소비기한’을 표시하도록 하는 ‘식품표시광고법'(이하 소비기한법)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2023년부터 식품에 유통기한 표시는 사라지고 소비기한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유통기한은 식품을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유통할 수 있는 기한, 즉 판매자가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소비기한은 해당 식품을 먹어도 문제가 없는 시점이다. 제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통상 유통기한은 소비기한의 60~70% 수준이다.

정부가 이 제도 도입을 추진한 것은 식품 폐기물을 줄이자는 취지에서였다. 유통기한은 제품의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에 불과하며, 이 기한이 지난 후에도 일정기간은 해당 식품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을 ‘폐기 시점'으로 인식해 먹을 수 있는 식품이 폐기물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유통기한 사용을 줄이고 있는 추세도 반영했다. 현재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와 선진국들은 소비기한 표시제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문제는 30년 넘게 사용된 유통기한 제도를 폐지하고, 소비기한으로 갑자기 교체하면서 먹거리 안전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재고 소진율이 빠른 대형마트는 자체적인 기준을 수립해 장기 재고 상품을 일괄적으로 처리하며 ‘신선함’을 강점으로 내세우겠지만, 재무구조가 취약한 식자재마트나 중·소형 점포에선 소비기한 임계 시점까지 상품을 판매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특히 대용량 장류나 통조림·병조림 등의 장기 보관 식품이 위험하다. 정보격차가 큰 고령층의 경우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의 차이를 잘 모르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된장은 기한이 조금 지나도 괜찮다'라는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소비기한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기하자는 의견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해당 의견은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기하면 비용이 7000억원 이상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며 ‘제품의 가격 상승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는 업계와 식약처의 주장에 묻혔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기하면 비용이 추가로 소요된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는 제쳐놓더라도, 300조원에 이르는 식품 산업 규모에 먹거리 안전을 위해 7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게 과연 과잉 투자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정작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가장 많이 폐기되는 식품인 ‘유제품’은 이번 소비기한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식약처와 국회는 우유에 소비기한이 적용돼 가정 내 보관 기간이 길어지면 우유 소비가 더 감소할 것이라는 낙농업계 의견을 반영해 유제품에 대해선 소비기한 도입을 8년 더 유예해 2031년부터 적용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2031년까지는 유제품은 유통기한, 그 외 식품은 소비기한을 표시하게 된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 사이에서 소비자들의 혼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소비기한 도입을 계기로 식품 유통업계에 ‘구매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량 구매→장기 보관→소비기한 임박상품 판매'로 이어지는 아노미 현상이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기한 임박 상품이 시장에서 대거 유통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면서 “매장에선 유통기한까지 판매하고, 소비자들은 소비기한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다”고 했다.

유통기한 폐지·소비기한 도입은 30년 넘게 이어온 소비 행태를 바꾸는 일이다. 갑작스런 변화로 인한 소비자들의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제도 안착 시까진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기할 필요가 있다.

윤희훈 기자(yhh22@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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