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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여름을 붉게 태우는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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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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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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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의 계절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짙푸른 초록을 이길 수 없는 시절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여름에도 짙은 녹음을 깨고 붉은빛으로 눈길을 끄는 꽃이 있다. 초여름부터 피어나 초가을까지 무려 백일 넘게 꽃을 피우는 나무여서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배롱나무’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된 나무다.

온난화 영향으로 최근에는 수도권에서도 심어 키울 수 있지만, 배롱나무는 오래도록 따뜻한 기후의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던 나무다. 크고 오래된 배롱나무를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배롱나무는 부산 화지공원 경내에 있는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다. 배롱나무 가운데 유일한 천연기념물이다. 풍수 ‘5명당’으로 꼽히는 화지공원은 고려시대에 벼슬을 지낸 동래정씨 정문도의 묘역으로, 배롱나무는 묘 앞 동서 양쪽에 한 그루씩 있다. 지금은 화지공원 앞으로 고층아파트가 즐비해 다소 답답한 풍경이지만, 묘 앞으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풍광은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왜 이곳을 명당이라 하는지 알아볼 만하다.

800년 전 정문도의 후손들은 가문의 영화를 기원하며 이곳에 조상의 묘를 짓고, 그 앞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줄기는 썩어 문드러져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버티고 살아 있던 뿌리에서 새 줄기가 솟아오르면서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처럼 자랐다. 새로 줄기가 솟아오른 것 역시 오래전이어서 더러는 이미 까맣게 썩어들었다.

땅 위로 올라온 줄기가 동쪽에는 네 개, 서쪽에는 세 개로 나눠져 있다. 동쪽 나무의 키가 조금 더 커서 8m를 넘고, 서쪽 나무는 6m쯤 된다. 배롱나무로서는 큰 나무다. 무엇보다 고르게 펼친 나뭇가지의 품은 사방으로 10m를 넘어 대단히 아름답다. 긴 세월 동안 사람살이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 애써 지켜낸 결과다.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는 사람의 손길을 타고 사람의 자취를 아름답게 꾸미며 융융하게 자란 이 땅의 여름을 상징하는 우리의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고규홍 천리포수목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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