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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조선인 귀여워했다?…日 군함도 왜곡 망신, 아베가 아베했다 [뉴스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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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유네스코의 ‘군함도 왜곡’ 공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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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의 모습. 교도=연합뉴스


“우리 아베 총리가 한국에 대한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시 하시마(端島ㆍ일명 군함도)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직전인 2015년 7월. 한국을 비공개 방한한 일본 고위 외교관이 한국의 고위 외교관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청와대에도 보고하라”며 펄펄 뛴 이유는 바로 강제노동에 대한 표현 때문이었다.

당시 한ㆍ일은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중이었다. 쟁점은 5만 7900명이 당한 징용 피해를 등재 과정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였다.

그러다 영어 표현을 ‘forced to work(강제로 일하게 된)’로 하기로 잠정 합의를 했는데, 한국이 여전히 일부 자료에서 ‘enforced work(강제노동)’라는 표현을 썼다면서 고위 외교관이 도쿄에서 서울까지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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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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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엔 비슷한 표현인데, 일본이 이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인 배경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인 ‘강제노동 금지 협약(Forced Labour Convention)’이 있었다. 유엔이 창설되기도 훨씬 전인 1930년에 마련된 협약인데, 협약 비준국이 강제노동을 행할 경우 처벌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전인 1932년 해당 협약을 비준했다. 그러니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군함도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할 경우 일본 스스로 국제법 위반국이라고 공인하게 되는 셈이었다.

협약은 ‘정상적인 시민의 의무’이거나 ‘전쟁 등 비상상황’은 강제노동의 예외로 보지만, 이는 다시 일제의 조선 합병 관련 불법성 인정 여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가 된다. 또 이조차도 한국 외 다른 국가 국적의 징용 피해자에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찬란한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려던 아베 총리의 야심이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오명을 더 부각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지경에 처했으니, 표현 하나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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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군함도 전경. 국가기록원은 1940년 조선총독부가 생산한 '노무자원 조사에 관한 건'이란 제목의 기록물 원본과 고 김광렬 선생이 2017년 국가기록원에 기증한 조선인 강제동원 관련 문서와 사진, 도면 등 총 2,337권 중 일부 기록의 원본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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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강제노동 사실 자체를 계속 부정하다가는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위원국 중 일부가 등을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일본은 한발 양보해 등재 결정과 함께 “(일본은)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brought against their will)’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로 노동한(forced to work)’ 사실이 있음을 인식한다”고 표명했다.

‘강제노동(enforced work)’이라는 단어 자체는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의 시인이었다. 일본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등 후속 조치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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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4일 일반 관람을 앞두고 내외신에 공개된 일본 정부 산업유산정보센터.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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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일본은 지난해 6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관하긴 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또 ‘아베가 아베했다’였다. 센터의 장소는 군함도 인근이 아니라 도쿄였고, 전시 내용도 가관이었다.

Q : (조선인에 대한)이지메(집단 따돌림)가 있었느냐.

A : “아니 귀여워해 줬지.”

Q : 채찍질은.

A : “노동시켜야 하는데, 채찍질하겠냐.” 군함도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말을 토대로 한 것이라며 재일교포 2세라는 스즈키라는 인물이 쏟아낸 ‘증언’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이 강제노동의 본질을 부인하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한 게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고, 여전히 ‘아베의 분노’가 투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어차피 관계도 최악인데 한국의 반발쯤이야 무시하면 된다는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한 뒤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으니 이 정도는 강행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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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에서 군함도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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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유네스코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쿄 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22일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의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속 조치에 대한 결정문을 채택했는데, 사실상 “제대로 한 게 없다”에 가까웠다. 일부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다.

“등재 대상의 온전한 역사(full history)를 보여주는 내용이 거의 없다. 전시된 정보는 다른 나라에서 징집된 노동자들이 일본인으로서의 처우를 받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군함도와 관련한 구두 증언은 마치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현재까지 희생자를 적절히 기리기 위한 전시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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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22일 채택한 결정문. 일본이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등 유산 등재 뒤 후속조치를 충분히 이행하지 않았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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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당사국(일본)이 관련 결정을 아직도 충분히 이행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강한 유감(strong regret)을 표한다.”

정치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는 유네스코가 ‘강한 유감’까지 표할 일을 만들다니, 어떤 의미에선 아베 총리가 참 대단한 일을 한 셈이다.

유네스코의 경고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보여준다.

철저한 고증과 취재로 정평이 난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에서 주인공 ‘지상’이 탈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잠결에 턱밑으로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뭉클하고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쥐가 내 얼굴에서 놀았다는 소리다. 쥐가 밟고 다닌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는데, 쥐한테 물렸는지 발톱에 할퀴었는지 따끔따끔 쓰리다.…힘든 하루하루, 숨을 쉬고 있으니 사람이지 내 목덜미를 기어다닌 쥐새끼보다도 못한 내가 아닌가. 쥐새끼야 저 가고 싶은 길을 갈 수나 있다. 그도 못하는 나는 뭐란 말인가.…어떻게든 이 섬을 빠져나간다. 쥐가 밟고 가는 나를 여기 이대로 처박아둘 수는 없다. 목숨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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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함도 역사왜곡'이 논란이 된 가운데 지난 13일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가 판매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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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다 차마 쥐새끼에 밟히며 살 수는 없어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지금 일본의 행태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삼켜냈던 군함도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인간성을 또다시 말살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근본적 문제는 ‘부(負)의 역사(negative heritage)’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일본의 자기부정에 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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