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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여름에는 종일 머리가 아파요” 혹한보다 괴로운 폭염 속 이주노동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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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0일 경기도 포천시의 한 비닐하우스 농장.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치솟았던 한낮 폭염은 절정을 넘겼지만 오후 4시 바깥 기온은 여전히 32도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땀이 흘렀다. 온도계를 켜보니 내부는 38도였다. 태국 이주노동자 A씨가 호박 뿌리를 다듬고 있었다.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오늘 너무 덥다”고 인사를 건네자 “구름이 껴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서둘러 마무리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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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포천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가 상의를 흠뻑 땀에 젖은 채 일을 하고 있다.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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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름이, 겨울보다 싫어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썸낭(29·가명)은 여름마다 두통을 앓는다고 했다. 열무와 배추, 오이, 호박 등의 시설 재배업 종사자는 고온의 비닐하우스 안에서 장시간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여름철 작업 환경이 취약하다. 녹색병원 이보라 인권치유센터장은 특별한 대피소와 그늘막 없는 현장에서 “본인이 힘들 때 멈춰서 쉴 수 없는” 노동자의 상태가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12월 한파가 몰아친 어느 날, 포천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캄보디아 출신 속헹이 간경화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은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숙소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불을 지폈고 정부는 실태 파악과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후 반 년, 날씨는 한여름으로 바뀌었다. 수도권은 일주일 가까이 폭염특보가 발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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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3시,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을 하는 가운데 내부 온도가 40도를 밑돌고 있다.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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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를 수확하는 썸낭의 작업은 새벽 6시에 시작돼 오후 5시에 끝난다. 11시간 노동 중 휴게시간은 점심을 먹는 1시간이다. 더운 여름에는 더욱 짧게 느껴지는 휴식이다. 삼시세끼를 모두 스스로 차려 먹는 그는 전날 밤에 다음날 점심을 미리 챙긴다. 1년 내내 따뜻한 캄보디아에서 왔지만 가장 싫은 한국의 계절은 지금 이 시기 ‘여름’이라고 했다. 오전부터 더위와 싸우며 작업을 끝내고 오후 12시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잠시 쉴 때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여름에는 더워서 계속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두통이나 어지럼증은 대표적인 온열 질환 증상이다. 고용주가 두통이 있다고 해도 일을 쉬게 해주진 않는다. “괜찮아, 그냥 일 해”라고 말하던 사장은 한 달 전 그에게 ‘휴대용 목걸이 선풍기’를 사줬다고 한다. 사업주는 폭염 시기 야외 노동자에게 열사병을 예방하기 위해 충분한 물과 그늘, 휴식 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하루 할당량을 끝내야 하는 이주노동자가 폭염 수칙에 맞춰 일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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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썸낭(29·가명)이 <이런경향>과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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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환경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가 주관한 농어업 분야 외국인 주거환경 실태조사를 보면 외국인 노동자의 99.1%가 고용주가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산다. 상시 주거시설로 ‘가설건축물’을 제공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이주노동자가 가장 많은 경기도 내 사업장의 경우 제공 숙소 중 가설건축물은 80.5%(14,90개소)다. 숙소에는 냉난방, 샤워실, 화장실, 채광, 환기 등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가건물 숙소 형태인 비닐하우스의 샌드위치 패널이나 컨테이너는 여름에는 외부의 열기, 겨울에는 한기가 고스란히 내부로 전해진다.

이날 방문한 포천 비닐하우스 농장 남자 노동자 숙소의 바닥 장판 온도는 오후 7시 기준 45도까지 올라갔다. 낮 동안 쌓인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공기를 계속 데우는 것이다. 침대 위에는 열기를 막고자 차광막을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로 옆 썸낭의 방에는 그나마 창문이 있고 선풍기도 1대가 있었다. 그는 “그래서 그나마 지내기 괜찮다”고 했다. 이보라 센터장은 이같이 “환기가 되지 않은 장소는 낮 동안에 쌓인 열이 발산되지 않아 폭염에 취약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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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한낮의 열기가 이주노동자의 숙소에 온도를 높이고 있다.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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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기숙사 포토다큐. /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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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는 속헹 사건 직후인 지난 1월, 농어업 분야에 고용된 이주노동자의 주거시설 기준을 강화했다.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 등 가건물을 숙소로 제공하는 사업장은 이주노동자 고용을 금지시켰다. 이같은 환경에 거주하는 노동자는 고용주의 허락없이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지침이 내려온 지 6개월이 지났지만 현장에선 “달라진 게 없다”고 입을 모았다. 노동부가 당장 새로운 숙소를 구할 수 없는 농장주는 상황을 고려해 개선 계획을 세울 경우 유예기간을 주고, 한시적인 ‘재고용’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지구인의 정거장’ 김이찬 대표는 “고용주들이 점검반에게는 계도 내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실행될 지는 미지수라며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에 살며 고통을 호소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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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가 <이런경향>과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유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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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 외국인 노동력을 투입하기 위해 ‘고용허가제’(EPS)가 도입된 지 17년째다. 매년 2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국내 농축산업 분야 사업장에서 고용돼 근무(2021년 기준 1만8266명)하고 있다.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먹거리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농촌의 노동력은 이주노동자에게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폭염 예보 문자를 받아볼 수도 없고, 무더위 쉼터를 이용하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는 여전히 위험한 노동을 이어가며 가건물의 숙소에 묵고 있다. 포천 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는 “한국의 농업과 어업은 이주노동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상황”라며 “이 노동자들을 마치 ‘일회용품’처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장은 <이런 경향>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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