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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6·25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 2년…구국영웅들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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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된 병적기록-인물화로 전국 수소문… “지자체 협조 절실”

동아일보

지난해 8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고 김성환 화백의 인물화 및 무공훈장 수여식’에서 전계청 육군인사사령부 인사행정처장(오른쪽)과 그림 속 참전용사의 유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육군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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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이 멈춘 지 약 70년 만에 참전용사인 두 작은아버지의 무공훈장을 받게 된 안봉순 씨(70)는 멈추지 않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4형제 중 셋째인 고 안석길 하사(상병), 넷째 고 안석렬 이등중사(병장)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입대해 육군 3사단 22연대에 배치됐다. 함께 결혼식을 올린 지 사흘 만이었다.

용맹하게 전장(戰場)을 누비던 형제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형은 입대 6개월 만에, 동생은 이듬해 정전협정 체결(7월 27일) 20일을 앞두고 전사했다. 그마나 동생은 유해를 전달받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지만 형은 아직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군 원덕면에 잠들어 있다. 급하게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미처 유해를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무공훈장 전달도 쉽지 않았다. 본적지 면사무소가 전쟁 통에 소실된 뒤 두 형제의 호적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후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이 병적(兵籍) 기록을 바탕으로 수소문한 끝에 14일 안 씨와 연락이 닿았다. 안 씨는 “국가가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는 것에 감사하다”며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 그동안 제사도 못 지냈는데 늦게나마 조카의 도리를 할 수 있게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 70년 전 희미한 기록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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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고 김성환 화백의 인물화 주인공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만득 하사(오른쪽)가 그림을 전달받고 있다. 김상규 육군군사연구소 박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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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용사는 약 100만 명. 이 중 17만9331명이 무공훈장 수훈자다. 하지만 아직 4만5938명(25.6%)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 전쟁 중에 작성된 병적 기록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아명(兒名)을 썼거나 생년월일이 실제와 다르면 당사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전역 후 본적을 옮기거나 행정구역이 바뀌면 찾는 범위가 넓어진다. 기록이 소실된 경우 당사자나 후손을 찾기가 더 힘들어진다.

수훈자 찾기에 속도가 붙은 건 2019년 7월 24일 ‘6·25전쟁 무공훈장 수여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다. 단장을 포함해 17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꾸려져 지난달까지 2년 동안 1만1675명에게 무공훈장을 전달했다.

조사는 70년 전 기록에서 쓸 만한 정보를 최대한 발굴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재는 쓰지 않는 약자나 휘갈겨 쓴 한자는 한자판독병조차 읽기가 쉽지 않다. 음은 같지만 다른 한자를 오기해 이름이나 지명이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어렵게 수훈자의 본적지를 확인하면 각 지방자치단체를 찾아가 과거 호적부나 현재 주민등록 기록과 대조한다. 권역을 나눠 3개 팀이 탐문을 하는데 아직 방문하지 못한 지자체도 많다. 양순일 중령은 “그래도 명단을 들고 가면 60% 정도 수훈자를 찾는다”고 말했다.

○‘고바우 영감’이 기록한 10인의 영웅

의외의 곳에서 수훈자를 찾는 경우도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했던 고 김성환 화백은 국방부 정훈국 소속 종군 화가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그는 1951년 10월 6사단 19연대를 찾아 금성지구(강원 철원군 일대) 전투에서 공적이 뛰어났던 장병 10명의 인물화를 그렸다.

김 화백을 만나 이 사연을 들은 육군군사연구소 김상규 박사는 참전용사 본인이나 후손에게 그림 사본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사단에 확인해 보니 10명 중 9명이 무공훈장 수훈자인데 2명은 아직 무공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사단과 국방홍보원은 그림 속 주인공을 찾는 ‘고바우 프로젝트’ 캠페인을 진행했고, 두 달여 만에 9명을 찾았다. 10인의 영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만득 하사(90)는 직접 그림을 전달받았다.

김 화백의 그림이 더 값졌던 건 그림을 통해 무공훈장 서훈이 누락됐던 참전용사까지 찾았다는 점이다. 조사단은 6·25 전투상보를 다시 확인해 고 서주선 하사의 공적을 심의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서 하사의 딸 서옥자 씨(60)는 “전쟁에서 손가락 2개를 잃은 아버지는 몸에 박힌 총알도 제거하지 못한 채 매일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며 “훈장과 그림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고바우 프로젝트’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10인의 영웅 중 양만식 하사를 찾지 못했다. 당시 김 화백이 발행한 신문 ‘웃음과 병사’에는 양 하사의 공적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양만식 하사는 BAR(브라우닝 자동소총) 사수로 1만 발 이상을 발사하여 놈들을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했으며, (중략) 이 소수의 병력으로 대적을 물리친 것은 실로 놀라운 만한 공적이다.”

양 중령은 “양만식 하사는 현재는 북한 땅인 황해도 연백군 지역 출신이라 소재 파악이 어렵다”며 “이북5도위원회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훈장을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거주 손자가 할아버지 무공훈장 찾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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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 조사단을 통해 무공훈장을 받고 묘지까지 찾은 경우도 있다.

김종태 씨(71)는 30년 넘게 국방부, 국가보훈처, 국립현충원, 유해발굴감식단 등을 찾아다녔지만 아버지 김윤식 일등중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지난해 조사단에 문의한 결과 아버지와 같은 군번인 참전용사가 1954년 무공훈장 수여자로 결정되고도 훈장을 받지 못한 사실을 확인했다. 조사단은 여러 기록을 확인한 끝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 일등중사의 묘지를 찾아냈다. 묘비에 적힌 이름(김준식)이 달라 자녀들이 아버지의 묘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조사단이 전국을 누비는 것만으로는 수훈자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 관련 부처의 협조가 필요하다.

고 나은철 이등중사는 외교부가 해외 동포들에게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덕에 후손들이 훈장을 받게 된 경우다. 캐나다에 살던 나 이등중사의 손자 나항렬 씨(50)는 올 3월 토론토 영사관 홈페이지에서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알게 됐다. 나 씨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하다 비슷한 이름(라온철)을 발견하고 조사단에 할아버지 군번 등 관련 기록을 이메일로 보냈다. 조사단은 나 이등중사의 호적등본 등 서류를 검토해 그가 무공훈장 수훈자인 것을 확인했다.

○“지자체 협조, 활동 기간 연장 필요”

10대 후반∼20대 초반 전쟁터로 뛰어든 참전용사들은 생존해 있다면 어느덧 90세 안팎이 됐다. 수훈자 찾기를 더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조사단이 무공훈장을 찾아준 수훈자 중 생존자는 3%(351명)에 불과하다. 2019년 9.8%였던 생존자 비율은 올해 2.3%까지 떨어졌다. 생존자들을 사망자보다 일찍 찾은 경우가 많고, 해가 갈수록 수훈자들이 사망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수훈자를 더 찾기 위해선 조사단 활동 연장을 위한 법률 근거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조사단 활동 기간(3년)이 끝나면 내년 8월부터는 조사단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무공훈장 찾아주기는 단절된 역사를 잇는 과정이자, 잠들어 있던 국가관을 깨우는 중요한 작업”이라며 “특히 생존자에게 훈장을 전달하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업을 널리 알린다면 수훈자 찾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거주자 기록과 열람 권한을 갖고 있는 각 지자체의 협조도 당부했다. 업무 부담이 크고 민원이 많은 수도권이나 큰 도시로 갈수록 담당 공무원이 비협조적인 경우가 많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는 육군인사사령부 전계청 인사행정처장(준장)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배 전우의 공훈을 찾아주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며 “특히 생존한 참전용사분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으려면 법 개정을 통해 조사단 활동 기간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룡=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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