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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이슈 미술의 세계

은퇴 정보요원들의 마지막 임무 [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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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나라가 당신 것이니
김경욱 지음
문학동네 | 412쪽 | 1만4800원

정보기관의 올드보이들이 옛 상사의 비밀스러운 지령을 따라 뭉친다. 한때 음지에서 국가 운영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반쯤 강제로 밀려난 이들이다. 존 르 카레의 하드보일드 스파이소설을 연상케 하는 시작이다.

하지만 김경욱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나라가 당신 것이니>의 향후 전개는 독자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다. 프롤로그에서 제시된 총격전과 테러 음모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사건이 실체 있는 테러인지도 모호하다. 시대착오적인 데다 과대망상에 빠진 이들이 머릿속에서 벌이는 소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히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빠지지 않은 얼룩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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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당신 것이니>는 김경욱 작가가 5년 만에 펴낸 여덟번째 장편소설이다. ⓒ백다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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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신문 부고에 날아든 암호문
김 실장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자백 기술자 김배우, 공작 설계자 김작가
그리고 나 김감독이 김 실장을 찾아 나선다
빨갱이들이 국가를 차지했다고 믿는

늙은 반공주의자들의 비루한 모험은
결국 세상의 해악으로 다가오는데…

김감독, 코드명 라이카는 칠순에 접어든 전직 정보요원이다. 관절염, 녹내장을 앓고 있으며 오줌도 시원하게 못 누는 처지다. 아내는 이혼서류를 남긴 채 요양병원에 들어갔는데, 김감독은 순간적으로 아내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충격을 받는다.

김감독은 오랜 의식처럼 신문을 펴다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부고를 읽는다. 그건 과거 직장 상사인 김실장, 코드명 목사가 자신에게 보내는 암호문이었다. 김실장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정보기관의 흑막이었다. 자신들이 죽이려 했던 이가 대통령이 되자, 김실장은 횡령 등의 죄로 오랜 수감생활을 한 뒤 행적이 묘연한 상태였다. 김실장을 찾기 위해 김감독은 오랜 동지들을 수소문한다.

김배우, 코드명 피셔맨은 자백을 받던 기술자였다. 무지막지한 고문을 하는 대신, 침술로 상대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만든 뒤 정보를 알아냈다. 지금은 무허가 침술사로 살고 있다. 김작가, 코드명 재단사는 공작의 내러티브를 기막히게 만들곤 했다. 지금은 과거 정보기관이 소재했던 왕릉의 관리자로 살아간다. 오랜만에 만난 세 요원은 김실장이 남긴 단서를 찾아 미술관, 낙원상가, 산중의 사찰, 급기야 미국 할리우드까지 향한다.

세 요원의 숨은 능력이 드러나면서 소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다. 김감독은 한 번 본 것을 사진 찍듯 기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능력 덕에 그는 1970년대 김일성과의 비밀회담 수행요원으로 발탁된다. 김감독의 임무는 김일성의 혹의 모양과 크기 등을 파악해 그의 건강 상태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 능력뿐이라면 알려진 인간 능력의 한계선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김감독에겐 물건을 만져 원소유주의 기억이나 상태를 알아내는 능력까지 있다. 버려진 라이터를 만져 그 라이터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특별한 능력을 설정에 넣은 덕에 <나라가 당신 것이니>는 정통 스파이 스릴러를 넘어 초자연적 슈퍼히어로물의 분위기를 낸다. 김배우의 정체 모를 침술 역시 초자연적 능력의 경계선에 근접한다. 반면 과거 공안당국의 공작정치를 연상케하는 김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범주에 들어있다.

<나라가 당신 것이니>는 김감독, 김배우, 김작가가 그들의 직장 상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김실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김감독 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공작정치 시절을 그리워하고, 과거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반역의 시대를 저주한다. 부모의 성을 병기하는 것은 ‘공산주의적 발상’이라 생각하고, 남북 혹은 북·미 대화는 한반도 적화의 지름길이라고 여긴다. 살아있다면 100세가 넘었을 김실장은 이 모든 시대착오의 거대한 뿌리 같은 인물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다만 조종할 뿐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채, 음지에서 양지의 나라를 좌지우지한다. 나라, 나아가 전 세계를 ‘빨갱이’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면 법과 도덕과 인륜 정도는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김감독, 김배우, 김작가가 일찌감치 발탁된 것도 모두 김실장의 은밀한 프로젝트의 결과였다. 조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김실장은 배신당할 일이 없고 ‘빨갱이’도 없는 하느님의 나라로 귀의하려 한다.

화자 김감독은 김실장의 흔적을 쫓으며 생각한다.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가로지르며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빨갱이들이 차지한 세상에 복수하기보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신기하고 흥미롭게 보였던 늙은 반공주의자들의 모험은 차츰 비루하거나 광기 어리게 전락한다.

그들끼리의 소규모 집회나 단톡방 험담으로 끝나면 상관없을 일이지만, 비상한 정국을 거치며 가다듬어진 특별한 능력이 시대착오·과대망상과 합쳐져 인류에 해악을 끼칠 지경이 된다.

작가는 “불가해한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게 마스크의 일이라면, 소설의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조차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라고 적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슬러 보겠다고,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바득바득 우겨대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설정까지 빌려올 수밖에 없었던 걸까.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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