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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단독] 판사 보조하는 재판연구원…판결문 초안 쓰느라 '녹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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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법부 핵심 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는 재판 중 상당수에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판결문 초안이 법관이 아닌 로스쿨을 갓 졸업한 재판연구원에 의해 작성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고법에서 재판연구원 근무 실태를 조사했는데, 2명 중 1명이 '가장 부담되는 업무'로 '판결문 초안(의견서) 작성'을 꼽았다.

24일 매일경제가 입수한 '서울고법 재판연구원 근무 실태 설문조사'(총 94명 연구원 중 58명 참여)에 따르면 '업무량이 부담되는 업무'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 중 54.5%가 '의견서 작성'이라고 답했다. 재판이 있는 주를 기준으로 주당 의견서 작성 건수는 민사부 2.12건, 형사부 1.69건, 행정부가 3.2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마다 차이가 있지만 통상 주당 3건 안팎의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을 감안할 때 상당수 판결문 초안을 경력 1~3년 차 연구원들이 작성하는 셈이다. 이들은 "재판부별로 담당하는 모든 재판에 대해 의견서를 작성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시간이 부족하고 전체적인 업무 수준이 저하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재판부에 접수되는 모든 사건의 판결문 초안을 연구원이 작성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일 중 3~4일 초과근무를 한다'는 비율이 72.7%로 나타났다. 주말의 경우 이틀 중 하루를 근무한다는 비율이 97.7%나 됐고, 주말 이틀 전부 근무한다는 응답도 2.3%였다.

응답자 중 89.5%는 과도한 업무 부담을 덜기 위해 업무 기준 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했으며, 83.5%는 업무 분배 현황을 공유하기를 희망했다. 이들은 이 같은 조사 결과와 관련해 업무 개선을 위한 제안 사항을 각 재판부에 전달하려 했지만, 법원에서는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판연구원은 "설문조사 결과와 제안 사항을 개별 연구원에게만 전달하고, 각 재판부에는 전달하지 못했다"며 "연구원 입장에서는 '대선배'인 고법 판사에게 (업무 부담 등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사법행정 담당 법관이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다' 정도로 입장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재판부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참고자료를 작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판결문 초안은 연구원들이 작성하는 자료 중 일부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또 설문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과도한 업무 강도, 담당하는 모든 재판의 판결문 초안 작성 등에 대해서는 "재판부별로 연구원 업무 강도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 로스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졸업해 변호사 자격을 갖춘 이들이 재판연구원으로 임용된다. 이들의 업무는 '재판연구원은 소속 법원장의 명을 받아 사건 심리와 재판에 관한 조사·연구, 그 밖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한다'고 법원조직법에 규정돼 있다. 재판연구원 제도 도입 취지는 2013년부터 시행된 법조일원화(일정 경력 변호사 자격자 중 법관을 선발하는 제도)에 따라 변호사 출신 판사가 늘어나자 사건·업무 처리를 위한 보조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법원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고참 판사들을 보조하는 데 더 활용되는 모양새다.

판결문 초안 작성을 재판연구원이 담당하는 게 바람직하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의료계에서 의사가 아닌 레지던트가 수술을 집도하는 게 바람직하냐는 논란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일각에서는 재판연구원 제도 도입 때부터 "연구원이 판결문을 작성한다면 국민의 재판 불신을 초래할 수 있고, 법관이 아닌 사람에 의한 판결이 될 수 있어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연구원이 판결문 초안을 쓴다고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재판부에 따라 사실관계 파악, 교육 목적 등 연구원에게 판결문 초안을 쓰라고 지시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연구원들은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해 업무 기준, 근무 행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요구하고 나섰다.

실제 작년 사법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재판연구원 제도의 바람직한 운영 방안'에서도 같은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연구진은 "재판연구원 업무량이 전적으로 재판부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지거나 업무 편차가 심한 게 문제"라며 "재판연구원 활용 방식을 합의하고, 업무 방식뿐만 아니라 업무량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같은 근무 행태에는 고참급 판사들로만 구성된 대등재판부가 늘어난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고법 재판부는 주로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됐다. 배석판사가 사건을 검토한 뒤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고, 재판장의 수정을 거쳐 판결을 선고하는 형태로 업무가 진행됐다. 그러나 배석판사가 사라지며 사실상 그 역할을 재판연구원이 맡게 된 것이다.

[정희영 기자 / 류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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