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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힘내라 빈과일보” 줄지어 기다린 홍콩시민들…대표적 반중매체 역사속으로, 마지막 100만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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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24일 홍콩의 한 인쇄소에서 빈과일보 직원이 마지막 신문을 인쇄하고 있다. 홍콩|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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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빈과일보. 고마워 빈과일보.”

23일 밤 홍콩 정관오에 있는 빈과일보 사옥 앞으로 수십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휴대전화 불빛으로 빈과일보 사옥을 비추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후 11시45분 빈과일보 편집국에서는 마지막 신문 인쇄 버튼이 눌려졌다. 람만청(林文宗) 편집장이 사무실에 남아 있는 동료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러분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외쳤다. “힘내라 빈과. 힘내라 홍콩.” 그리고 서로를 끌어 안았다. 한 기자는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기사를 쓰면서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며 “이곳은 내 일터일 뿐 아니라 내 집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신문 발행 작업을 마친 직원 30여명은 시민들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건물 밖에 있던 시민 후이씨는 “26년전 첫 발행때부터 읽었던 신문과 언론의 자유에 작별을 고하러 왔다”며 “이제 감히 목소리를 낼 신문은 한 곳도 없다. 언론 자유는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말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 마지막 인쇄를 마친 빈과일보 100만부가 시내 곳곳의 가판대로 옮겨졌다. 빈과일보는 이날 평소보다 10배 이상 많은 신문을 발행했다. 1면 제목은 “홍콩인들이 빗속에서 고통스런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빈과일보를 지지한다’”였다. 안쪽에는 ‘안녕’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그동안 발행된 신문 1면을 모아 편집한 사진이 실렸다. 인쇄된 신문이 도착할 무렵 시내 가판대 앞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한 시민은 “마지막 신문이 발행된다는 얘길 듣고 밤 10시부터 나와 가장 먼저 줄을 섰다”며 “10부를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홍콩의 대표적 반중매체 빈과일보가 24일 지면 발행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홈페이지 역시 이날 자정을 기해 운영이 중단돼 과거 기사도 볼 수 없는 상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명보 등 현지 언론은 그 마지막 날의 표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SCMP는 “빈과일보는 신문 그 이상이었다. 팬들에게는 자유의 수호자였고, 적들에게는 국가를 더럽히는 자들이었다”며 “비평가들은 선정주의와 친야당·반중성향을 혐오했고, 충실한 독자들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 없는 보도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그 신문을 좋아했다”고 전했다.

빈과일보는 의류브랜드 ‘지오다노’를 창업한 지미 라이(黎智英)가 1995년 창간한 신문이다. 라이는 1989년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를 계기로 미디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빈과일보가 처음부터 반중성향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에는 상업성을 띠며 선정적인 보도로 많은 논란을 불렀다. 빈과일보가 정치 보도에 집중하며 홍콩의 대표적 반중매체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였다. 사주인 라이도 2014년 ‘우산 혁명’과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홍콩 민주진영을 대표하는 인사가 됐다.

빈과일보가 지난해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 이후 당국의 표적이 돼 1년만에 문을 닫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라이는 이미 지난해 8월 체포돼 불법 집회 조직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도 재판을 받고 있다. 보안당국이 지난달 홍콩보안법을 근거로 라이가 소유한 빈과일보 모회사 넥스트디지털 지분 등 그의 자산을 동결했을 때부터 홍콩에서는 빈과일보가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경찰이 지난 17일 빈과일보를 급습해 압수수색을 벌이고, 라이언 로 편집국장과 청킴흥(張劍虹) 넥스트디지털 최고경영자 등 5명을 체포하면서 폐간은 현실화됐다. 보안당국이 관계사 3곳의 자산 1800만홍콩달러(약 26억원)를 동결하면서 빈과일보는 신문 발행 비용과 직원 월급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당국은 빈과일보가 기사를 통해 홍콩과 중국에 대한 다른 나라의 제재를 요구해왔다며 홍콩보안법 상 ‘외국 세력과의 결탁’ 혐의를 적용했다. 홍콩보안법이 눈엣가시 같았던 언론사를 옥죄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반 초이 홍콩중문대 교수는 “빈고일보의 인기는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에 대한 홍콩인의 불안에서 기인했고,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라며 “빈과일보 폐간은 한 시대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브루스 루이 홍콩침례대 강사는 “빈과일보는 일국양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온도계이자 상징적인 조직이었다”고 평가했다.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은 성명을 내고 “빈과일보 폐간은 홍콩보안법이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언론 자유를 억압하는 데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대만의 대중국 업무를 담당하는 대륙위원회도 “불행한 사건으로 홍콩의 신문·출판·언론 자유는 종언을 고하게 됐다”며 “이를 통해 국제사회는 중국 공산당이 이견을 억압하기 위해 극단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베이징|이종섭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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