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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한국에서 신인작가로 산다는 것... "비트코인 하듯 일희일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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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통해 첫 책 낸 신인작가 3인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소설가로 첫 책을 내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신문사나 출판사의 신인 공모를 통해 데뷔한다. 이후 계절에 한 권씩 나오는 출판사 문예지의 청탁을 받아 단편 소설을 발표한다. 데뷔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일부를 제외하면 청탁은 드물게 온다.

그렇게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에 걸쳐 발표한 소설 7~8편을 엮어 첫 단행본을 낸다. 그 사이 또 다른 많은 신인 작가들이 탄생했다. 청탁을 받지 못해, 작품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서,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가도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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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세 편의 소설만을 한 권에 엮어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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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꼭 ‘여덟 편’이여야 할까? 출판사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이 질문에서 탄생했다. 작품 개수를 세 편으로 줄이면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 편만으로 단행본을 엮는 것은 국내 문학 출판계에서는 최초의 시도다. 작가 에세이를 더해 분량을 보완했다.

2월 박서련 작가의 ‘호르몬이 그랬어’를 시작으로 총 6권이 나왔다. 이 중 배기정(‘남은 건 볼품없지만’), 임국영(‘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장진영(‘마음만 먹으면’) 세 명의 작가가 트리플 시리즈를 통해 첫 책을 냈다. 15일 서울 마포구 자음과모음 사옥에서 세 명의 신인 작가와 만나 ‘첫 책을 내는 기분’과 ‘한국에서 신인 작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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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 편만을 엮어 단행본으로 선보이는 '트리플' 시리즈를 통해 첫 책을 낸 세 명의 신인작가를 15일 마포구 자음과모음 사옥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장진영, 임국영, 배기정 작가.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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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낸 기분, 어떤가?


장진영(이하 장)= 매일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세일즈 포인트를 확인한다. 오늘은 떡상했군, 소폭 조정 단계군, 이렇게. 비트코인 보듯 일희일비한다.

임국영(이하 임)= 지금까지 면허는 있는데 차가 없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작가가 된 게 실감이 난다. 매일 일어나자마자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검색해본다.

배기정(이하 배)= 지금껏 어머니 말고는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고 주변 아무도 생각 안 했다. 책이 나오니 “네가 진짜 글을 쓰고 있었구나” 하더라.

어떤 경로로 소설가가 됐나?


임=고등학교는 시골이라 할 만한 데서 나왔다. 주변에 아무도 소설을 안 쓰니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생계를 위해 요식업계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2017년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배=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졸업했다. 도쿄에 잠깐 살던 때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했는데,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영상 언어로 표현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시나리오보다는 소설이 마음 속 얘기를 풀어내기에 더 적합했다. 그러다 2018년 웹진 비유가 창간되며 생긴 창작지원사업으로 데뷔하게 됐다.

장=어떤 계기로 나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플룻을 전공했다. 글을 전혀 쓸 줄 모르니 배워야겠다 싶어서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짧게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썼고 2019년 자음과모음을 통해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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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정, 임국영, 장진영 소설가가 자신들의 첫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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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나?


임=서른까지 등단 시스템을 통과하지 못하면 게임 시나리오라든가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서른 살 바로 직전에 등단이 됐다. 소설가로 데뷔하지 못해도 뭐든 쓸 거라 믿으며 불안함과 아쉬움을 견뎠다.

배=영화과에 입학하면서 객관적 성과에 대한 기대를 체념했다. 물론 ‘아, 나 영영 안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긴 했다. 돈은 벌어야 하니 회사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대신 회사 다닐 때 일은 진짜 열심히 했다. 언제든 퇴직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웃음)

‘트리플’ 시리즈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첫 책을 엮었다.


임=책 내기 전까진 “아 내가 이렇게 잊혀지는구나” 싶기도 했다. 세 편을 연작으로 썼는데, 내 콘셉트를 보여줄 계기라고 생각했고 독자 입장에서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의 단행본이 ‘정규앨범’이라면, 트리플 시리즈는 ‘미니앨범’ 느낌이다.

배=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어서, 출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스팸 전화인줄 알았다. 책을 내고 나서는 세 편이라 더 좋다는 반응이 많았다. 사람들이 짧게, 빨리 읽을 수 있는 글을 좋아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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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작가 모두 트리플 시리즈를 통해 데뷔 2~4년만에 비교적 빨리 첫 책을 엮었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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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작가가 활동하기에 요새 문학계는 어떤가?


배=꼭 소설만, 혹은 시만 써야 작가라는 생각 자체가 많이 줄었다. 다양한 글을 선보일 통로가 늘었다. 독자들도 더 이상 종이책만 고집하지 않는다.

임=예전처럼 막연히 청탁을 기다리기보단 직접 출판사에 투고하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다. 다양한 문학 플랫폼도 많이 생겼다. 작가가 능동적으로 글을 선보일 곳을 찾는다면 주목 받을 환경은 늘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


임=첫 책은 나로서도 도전해본 기획이다. 이걸 기점으로 앞으로 쓸 작품 느낌이 달라질 것 같다. 나도 기대가 된다. 단편소설 투고도 열심히 할 생각이다.

배=예전에는 ‘장르'라는 특성 때문에 작품성이 가려지는 일이 많았는데 요새는 달라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장르소설을 써보고 싶다.

장=책과 글은 결국 하나의 상품이라고 본다. 최대한 명품을 만들고 싶다. 한국문학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데,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 파도를 잘 타고 싶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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