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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만물상] 코로나 백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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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외환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 ‘코리아 바겐세일’ 장(場)이 펼쳐졌다. 미국계 사모펀드가 외환은행, 극동건설 등 알짜 기업,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다. 몇 년 뒤 되팔아 5조원이 넘는 차익을 남겼다. 외환 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는 위기를 기회로 잡는 국내 투자자도 등장한다. 한 종금사 직원이 투자금을 끌어모아 아파트를 헐값에 사들이고 원화 수익을 달러로 바꿔 이중 대박을 터트린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도원


▶현금이 풍부한 부자들에게 경제 위기는 좋은 자산을 싸게 사들일 기회가 된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당시 부자들은 30년 전 가격으로 돌아간 주식을 헐값에 매집했다. 다급한 각국 중앙은행은 대공황을 막기 위해 새 돈을 무제한 찍어 뿌렸다. 자산 시장에서 유동성 잔치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 부자가 2008년 10만5000명에서 2009년 13만2000명으로 불어났다.

▶유동성 잔치에 따른 자산 버블은 신흥 부자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2000년 초 닷컴 버블이 수많은 투자자를 울렸지만,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 신흥 억만장자를 낳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예상 밖의 글로벌 증시 활황은 기업공개(IPO) 붐으로 이어져 전 세계에서 신흥 갑부를 배출하고 있다. 올 1분기 중에도 세계 증시에서 창업자들이 IPO를 통해 1056억달러(약 117조원)를 거둬들였다.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 사태에도 순자산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 백만장자가 520만명이나 새로 탄생했다고 한다. 2019년 증가 폭(110만명)의 다섯 배에 이른다. 한국의 백만장자도 105만명으로 1년 전보다 14만명 늘어났다. 백만장자 급증의 주 요인은 각국 정부의 돈 풀기에 따른 자산 가격 급등이다. 지난 3월 하나은행이 낸 ‘한국 부자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0% 이상 투자 수익을 냈다는 부자가 23%에 달했다. 1년 전엔 이 비율이 4%에 그쳤다.

▶자산 양극화가 심화되자, 학계와 정치권에선 기본 자산(basic capital) 도입 주장이 나온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5세 이상 모두에게 국가가 12만유로(약 1억6000만원)를 지급해 자산 격차를 줄이자고 제안한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청년 기초 자산’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지만 지금 우리 분위기라면 청년들은 그 돈을 들고 바로 코인 거래소로 달려갈 것 같다. 땀 흘려 저축해 내 집 장만 꿈을 이루던 시절이 아득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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