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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경향의 눈]“내 딸 이 중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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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꿈의 직장이 무덤으로 바뀐 것은 불과 4년 만이었다. 2017년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공군 부사관에 부푼 마음으로 임관한 스무 살 이 중사는 4년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함께 근무했던 이들은 이 중사를 남의 일까지 도맡아 했고, 한번도 본인 일을 병사에게 미룬 적 없으며, 늘 다른 이를 배려했던 성실하고 책임감 많은 직업군인으로 기억했다. “결코 관심병사일 리 없었던” 그가 비참한 낙인과 굴레 속에 스러졌다. 원치 않은 회식 자리에 불려나갔다가 부대 복귀 차량에서 선임에게 추행을 당한 3월2일부터 지옥 같은 절망 속에 혼인신고 당일 스스로 먼 길을 떠날 때까지 81일. 성추행 직후 명백한 증거까지 제시하고 스무 번이 넘도록 신고했지만, 백방으로 보낸 구조신호는 조직적 은폐에 꽉 막혔다. 도움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유족들이 국민청원을 하지 않았다면 ‘단순 변사’로 묻힐 뻔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경향신문

송현숙 논설위원


관련 기사들 속에서 유난히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른 대목이 있었다. ‘나 이렇게 힘들게 한 사람 그냥 안 둘 거야’라며 직장 내 괴롭힘을 얘기하던 딸에게 “항상 뜻이 맞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직장생활은 다 그러니 참으라”고 했다는 어머니의 오열이었다.

젊은 여성들의 직장생활을 생각해본다. 이번 사건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직장 내 성폭력의 낯익은 전개 과정을 드러냈다. 실수를 가장한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린 후 보호는커녕 2·3차 가해에 시달리는 상황, 조직의 오점을 외부에 드러냈다는 따가운 시선과 이를 덮으려는 은폐와 회유, 사건 축소 움직임…. 대부분 직장 내 성폭력은 권력을 쥔 가해자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전전긍긍하던 피해자가 성폭력 고발 사실을 자책까지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군대뿐 아니다.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대학, 예술계, 의료·법조계 등 어디서나 크고 작은 조직보호 논리가 작용한다. 평생 일터로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해 들어간 직장이지만 여성들을 동등한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문화는 곳곳에 만연해 있다. 그러니 수치심과 모멸감에 치를 떠는 피해자에게 가해자 측이 “성추행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가해자가 불쌍하지 않으냐”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되겠느냐” 따위의 폭력적 언어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가해자는 사건 발생 111일 만에, 피해자 사망 한 달 만에 구속됐다. ‘보복 협박’ ‘강제추행 치상’ 혐의까지 더해져 엄벌이 예상된다고 한다. 그러나 엄벌만으론 바뀌지 않는다. 2013년 육군 직속상관에게 성추행당한 여군 대위가, 2017년에는 해군 장교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대위가 세상을 등졌다. 그때마다 징계가 내려지고 성폭력 관련 매뉴얼도 늘어났지만 또 다른 비극을 막진 못했다. 지난해 군 내 성폭력 범죄 건수는 771건으로 하루 2건이 넘는 꼴이다. 드러난 것만 그렇다.

전문가들은 중요한 건 성폭력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고하면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 속에 안전하게 일터로 복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매번 신고해도 고쳐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며 아예 피해자가 입을 다무는 문화, 절망적인 집단체념이 쌓여간다. 일이 터질 때마다 관련 제도와 매뉴얼이 계속 늘어갔음에도 이들이 무용지물이 된 이유를 상세히 밝혀야 한다. 어느 지점에서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정확히 드러내고 보완해야 한다. 아울러 성폭력 ‘무사고’ 실적이 아니라, 성폭력 발생을 드러내고, 이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 좋은 실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잠재적 범죄를 막을 수 있다.

전화선 너머 감정을 꾹꾹 누른 이 중사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인신고날 딸이 동영상으로 죽음을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딸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민식이법’처럼 아이 이름을 딴 군법을 만들어서라도 군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우리 딸이 당했던 억울한 죽음, 피해받는 남녀 군인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것이 아이의 뜻을 잇는 길일 겁니다.”

이 중사는 회유에 고개 숙이는 대신, 휴대전화 동영상 버튼을 눌러 죽음으로 불의한 조직문화를 고발했다. 언제까지 피해자가 참아야 하고 조롱당해야 하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이 비정상의 고리를 이젠 끊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 침묵하는 다수의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으로 이 사회가 함께 이 중사의 넋을 위로했으면 한다. 다시 한번 용감한 대한민국 군인 이 중사의 명복을 빈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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