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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배영은의 야·생·화] 김강민은 여전히 기립박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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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프로 입단 21년 만에 투수로 출전한 SSG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 [사진 SSG 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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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은의 야野·생生·화話]

프로야구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39·SSG 랜더스)은 대구중 시절 투수였다. "에이스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야구 명문 경북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1학년 때 크게 다쳤다. 손등뼈가 부러져 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경기에 나서려면 투수를 포기해야 했다. 내야 수비를 시작했다. 고3 때 잠시 투수를 겸업했지만, 2001년 SK 와이번스(SSG의 전신) 입단 후 1년간 내야수로 뛰었다.

그래도 투수에 미련이 남았다. 1년 뒤 결국 재도전을 결심했다. 직구 구속이 시속 140㎞대 중반까지 나왔다. 이를 악물고 노력하면, 투수로 프로 마운드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2002년 2군 경기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마운드에서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까지 가지 못하고 잔디에 떨어졌다. '너무 살살 던졌나' 싶어 힘을 줬더니 이번엔 포수 뒤 그물까지 날아갔다. 그게 '투수 김강민'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유 없이 '영점'이 잡히지 않으니 내야 송구도 어려웠다. 프로 3년 차로 접어들던 2002년 말, 김강민은 처음으로 '외야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남들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외야는 예상보다 더 넓었다. 타구 판단조차 쉽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과 기약 없는 2군 생활도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의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05년 마침내 1군 주전 외야수가 됐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입단 후 포지션을 두 번 바꾼 김강민은 그렇게 외야수로 프로에서 살아남았다. 그냥 '생존'만 한 게 아니다. 수많은 타자가 김강민에게 홈런 혹은 안타를 도둑맞았다. 전 구단 감독과 동료가 "중견수 수비는 김강민이 KBO 1등"이라고 인정했다. 수비 잘하는 후배 외야수들은 앞다퉈 "김강민 선배가 롤모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됐다. 몇 년 전부터 경기 출장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올 시즌이 끝나면 SSG와 2년 계약도 끝난다. 은퇴를 고민해야 할 시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SSG 벤치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김강민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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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21년 만에 투수로 출전한 SSG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 [사진 SSG 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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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버틴 덕에 학창 시절의 꿈도 이뤘다. 22일 LG 트윈스와 홈 경기에서 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1-13으로 크게 뒤진 9회 초 1사 후, 다른 투수들의 힘을 덜어주기 위한 '땜질 등판'이었다. 김강민은 언제나 그랬듯 최선을 다했다. 정면승부를 하다 홈런을 맞았고, 곧바로 시속 145㎞ 직구를 던져 삼진을 잡았다. 단 한 순간도 야구를 허투루 대한 적 없는, 베테랑 선수의 '최선'이었다.

SSG 팬들은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김강민을 기립박수로 맞이했다. 익숙한 장면이다. 김강민은 종종 믿기지 않는 호수비로 기립박수를 받곤 했다. 다만 이번엔 이유가 조금 달랐다. 그건 그냥 '김강민'이라는 이름의 선수를 향한 존경과 경탄의 박수였다.

누구나 김강민처럼 선수생활을 하면 이렇게 존경받을 수 있다. '김강민처럼 하기'가 무척 어려운 게 문제다. 누군가의 귀감이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배영은 야구팀장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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