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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세상읽기] 쿠팡의 로켓 회피 / 손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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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손아람ㅣ작가

‘커튼 롤러’라는 물건이 있다. 레일 아래로 커튼이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도와주는 플라스틱 바퀴다. 철물점이나 잡화점에서는 잘 취급하지 않는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 봉지를 천원에 구입할 수 있지만, 배송료 3천원이 붙으면 커튼레일 세트 전체와 같은 돈을 지불하게 된다. 쿠팡의 장바구니에 담아놓기 딱 좋은 물건이다.

커튼 롤러에 커튼을 달려면 고리가 필요하다. 쉽게 구하는 S자형 커튼핀을 쓰면 천장과 커튼 사이에 빈틈이 생기고 보기도 깔끔하지 않다. 이럴 때 쓰는 물건으로는 ‘핀배지’라는 게 있다. 압정과 깍지가 한쌍을 이루는 상품이다. 커튼 롤러보다도 수요가 적은 공산품이라 부르는 이름조차 제각각이다. 어떤 쇼핑몰에서는 ‘브로치 뒤에 끼우는 그거’라는 제품명으로 팔리고 있다. 가격은 100원도 하지 않는데 배송료는 역시 3천원이다. 이것도 쿠팡의 장바구니에 담아놓기 좋다. 상품 총액이 2만원을 넘기면 쿠팡에서는 무료로 배송을 해준다.

모두가 로켓만큼 빠르다는 쿠팡의 배송 속도에 놀랄 때, 나는 별처럼 무수한 상품을 다 직배송하는 비결이 더 궁금했다. 불에 타고 남은 건물의 거대한 뼈대 사진과 함께 실린 사건 기사들을 읽으면서 소비자 편익 저편의 풍경을 마침내 그려볼 수 있었다. 천원짜리 커튼 롤러, 백원짜리 핀배지, 거미줄처럼 얽힌 컨베이어벨트, 산더미처럼 쌓인 택배상자, 상품을 바쁘게 분류하는 장갑 낀 손, 휴대폰을 압수당하고 화장실도 제때 갈 수 없는 직원들.

재해의 전당이나 다름없는 쿠팡은 향후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받을 가능성이 높다. 화재가 발생하자 전국 언론에 사임 소식을 당일배송한 김범석 의장이 이 법을 무력화시킨 마지막 인물로 기록되진 않을 것 같다. 과거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늘려 노동법을 회피했듯이, 앞으로는 회사를 직접 소유하는 대신 바지사장을 세운 뒤 지주회사를 통해 간접지배하는 전략(‘로켓 회피’라 명명한다)이 중소기업까지 퍼질 거라 예감한다. 대표이사 개인으로 처벌 범위를 확대한 중대재해처벌법도 로켓 회피를 사용하는 자본 그 자체를 처벌할 수는 없다.

로켓 회피를 다스릴 대책은 기업의 매출에 비례하는 막대한 과징금을 매기는 것뿐이다. 벌금으로 순이익이 조정되면 주주도 영향을 받기에 지배적 자본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기업활동에서 자본이 이득을 얻는 만큼 책임도 나누는 구조다. 중대재해처벌법의 모태가 된 영국의 기업살인법이 이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중대재해처벌법도 입안 당시에는 매출액의 10%에 이르는 최대 과징금을 정했지만, 최종 입법안에서는 과징금이 50억원 이하 정액으로 쪼그라들었다. 연매출 수십조원대 기업에는 만분의 일에 불과한 돈이다. 1억원을 버는 사업자가 벌금 만원을 내는 셈이다. 재계는 그조차 유례없는 과잉입법이라며 기업활동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매출 비례 과징금 제도는 국내에서도 이미 시행 중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위반 기업에 매출액의 3%까지 과징금을 부과한다. 이 법을 위반한 페이스북은 67억6600만원, 인터파크는 44억8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같은 위반으로 유럽연합은 페이스북에 매출액 4%에 해당하는 2조여원의 과징금을 검토 중이고, 미국은 이미 6조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사상 최고 주가를 돌파한 페이스북의 기업활동이 위축되었다는 징후는 없다. 개인정보 유출 기업에 무제한의 매출 비례 과징금을 물리는 한국에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거나 사회적 참사를 일으킨 기업이 정액형 벌금을 낸다면 법률 간 형평도 맞지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유례없는 과잉입법인 게 아니라, 2차산업에 기반한 국내 대기업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의 유례없는 과잉보호를 받는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입힌 개인은 한도 없는 배상책임을 진다. 흔히 ‘금융치료’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금융치료 기법은 주로 기업이 노동자에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파업이 발생하면, 기업은 매출에 비례하는 손해배상액을 청구하는 것으로 반항적인 노동자들을 ‘치료’해왔다. 로켓 회피를 시도하는 기업에도 이 치료법은 필요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원안대로 과징금을 내야 했다면 쿠팡은 1조원 이상의 벌금을 물 수도 있었다. 쿠팡 같은 대기업들이 줄줄이 망할까봐 걱정할 이유가 있었을까? 기업인들은 회사가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치료법을 반드시 찾아냈을 것이다. 로켓보다는 안전한 경영 방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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