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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요리인생 정리할 책 만들어 ‘참 행복하다’ 활짝 웃곤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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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요리연구가 고 임지호 선생을 그리며

한겨레

지난해 강화도의 산당에서 고 임지호 선생이 <임지호의 밥 땅으로부터> 책에 실을 요리에 대해 김주원 편집장과 의논을 하고 있다. 사진 궁편책 제공


지난 12일 임지호 선생님께서 갑자기 떠나신 이후 한 주는 너무도 길고, 짧았습니다. 겪어본 적 없는 이상한 시간 체계 속에서 의식은 도피하듯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지난해 초봄 강화도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날, 수년간 선생님의 한결같은 행보를 묵묵히 지켜보며 책을 기획해오신 출판사의 김주원 대표님은, 불현듯 오늘 뵈어야겠다며 강화도로 떠날 채비를 했고 저는 그 길에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선생님을 <임지호의 밥 땅으로부터> 저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첫인사와 함께 건네드린 명함도 보지 않으셨고 그 무엇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대표님 말씀을 찬찬히 들으시더니 “내 인생을 이렇게 당신을 통해 책으로 정리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합시다. 대신 재미있게 합시다. 이 책을 위해 영혼을 바쳐 요리할 겁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다음날 동틀 무렵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밤새 책에 실릴 요리들을 정하고 재료 스케치도 다 그려놓았다며 파일을 보내셨는데, 받아보니 백 가지가 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요리 담을 그릇을 직접 빚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직 계약도 하기 전이었습니다. 이처럼 선생님께서는 책 작업의 시작부터 태산 같은 신뢰와 열정을 쏟아주셨습니다.

바람결에 실린 공기에도 무수한 이야기가 스며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겪은 임지호 선생님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몇 개의 활자로 그 분을 축약하는 건 무척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이 지면을 통해 저자 임지호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기려 합니다.

책에 실린 요리 작업은 선생님이 계신 강화도에서 한 달 남짓 진행했습니다. 우선 요리 목록에 대해 상의를 드렸습니다. 선생님의 요리 목록은 육고기와 들풀, 두 가지 주재료로 나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래 기획의도가 ‘들풀로 만든 한 끼’였기에 육고기는 다음 책에서 다루는 편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습니다. 힘드실 터이니, 이번에 육고기 요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 드리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아닙니다. 나는 다 할 겁니다. 처음부터 이 요리들을 다 할 생각이었습니다. 요리는 내가 할 테니 나중에 빼든 넣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 열정에 훗날 편집 과정에서 고민을 했지만 결국 육고기 요리들은 싣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단 한 번의 불편한 기색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집본을 보여드려도 무엇 하나 수정해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맨처음 말씀처럼 출판사의 편집권을 철저히 존중해주신 저자셨습니다.

선생님의 요리는 재료로 쓰일 들풀은 물론이고 그것을 채취하는 과정부터 발이 닿는 곳곳의 자연을 귀하게 대하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너른 갯벌 가득 돋아난 함초를 구할 때도 한 번 앉은 자리에서 다 캐버리면 안 된다며 여기저기 걸음을 옮기시던 선생님. 길이 나지 않은 산을 오를 때는 앞을 막아선 나뭇가지를 쳐내는 대신 몸을 낮추어 지나가느라 등에 자잘한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업고 다니시던 뒷모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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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강화도에서 책에 실을 요리의 재료를 찾아다니던 고 임지호 선생의 등에 나뭇가지들이 업혀 있다. 사진 궁편책 제공


밤샘의 연속이었던 책 작업 기간 동안 선생님은 요리는 물론이고 양념 하나까지 직접 만드시느라 잠시도 앉지 못하셨습니다. 그 열의에 저 역시 감히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내 서서 호흡을 맞춰야 했지요. 그러다 결국 한 번은 제 무릎이 고장났는데 선생님께서는 다음날 아침 관절에 좋다며 도가니탕을 끓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꺼내어 형상화한다면 아마 갓 지은 밥을 고봉으로 담아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밥에서 퍼지는 더운 기운이 제 속까지 데워줘 작업을 위해 지새운 수많은 밤, 자주 복받치던 울음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요리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으면서도 막상 완성된 음식의 맛을 보면 예상과는 달랐는데 그게 참 신기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음식에 담긴, 먹는 사람을 헤아리는 선생님의 마음을 제가 다 짐작할 수 없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선생님 요리 철학의 정점은 ‘존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요리 앞에서 당당하고 정의로우셨습니다.

선생님은 종종 “다겸아, 너도 행복하나? 나는 참 행복하다. 나만 행복하면 안 되는데…”라고 물으시며 활짝 웃곤 하셨습니다. 태어나 요리로써 삶을 노래했다고 말씀하신 선생님, 함께해주셨던 모든 순간은 선생님의 노래 속 한 곡조와 같았습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들풀과 매 순간 스치는 사람을 구별 없이 존중하셨던 임지호 선생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다겸/궁편책 <임지호의 밥 땅으로부터>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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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지호 선생의 마지막 요리책. 사진 궁편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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