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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만에 밝혀진, 31살에 사형된 언론사 사장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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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지난달 21일 기준 3636건, 7443명의 신청 사건이 접수됐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과거사와 관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과거사는 지난 일이 아닌 현재의 아픔이다.

한국사회에는 2000년대 초반 두 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과 2009년 제1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있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개시에 맞춰 1기 진실화해위의 조사 사례를 살폈다. 이를 통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그런 가운데에도 과거사 조사가 수행되며 남긴 성과를 들여다보려 했다. 그속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진상 규명을 지속하는 한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프레시안>에서는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기획을 통해 진실화해위 활동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둘째 편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진실규명 결과 보고'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의 저자인 원희복 씨의 글 등을 바탕으로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법살해된 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이야기와 이후 진상 규명 과정을 다뤘다.

바로가기 :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① : 동굴서 양팔 묶인 시신으로 발견된 아들, 진상 밝히려 애쓴 35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서른한살 언론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의 이름은 조용수. 진보성향 신문 <민족일보>의 사장을 지낸 이였다.

당시 재판부는 '조용수가 주요 정당 간부로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이근영을 통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신문사를 만들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활동을 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법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잘못된 것이라는 법원의 재심 결정이 있기까지 47년이 걸렸다.

진보 성향, '중립화 통일론' 등으로 큰 성공 거둔 <민족일보>

4·19혁명이 있던 1960년 7·29 선거를 분열된 채로 치른 뒤 233개 지역구에서 민의원 5명, 참의원 2명 당선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혁신계 정당과 단체들은 이후 혁신계 정치 세력의 통합과 혁신계를 대변할 신문의 창간을 활동과제로 천명했다.

그 결과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됐다. 이때 대표이사를 맡은 이가 후일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법살해된 조용수다.

<민족일보>가 창간 당시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사시(社是)를 밝혔다.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悲願)을 호소하는 신문
창간 한 달도 되지 않아 <민족일보>는 매일 4만 여부를 발행하는 신문이 됐다. 당시의 주요 신문이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빠른 성장이었다. 가판 판매 부수는 1위였다.

<민족일보>의 대표적 성과는 장면 내각이 추진하던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등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앞장선 것이었다. <민족일보>는 두 법에 대한 반대 논설과 기사를 적극적으로 실었고 결국 법 제정은 좌절됐다.

당대의 주요 관심사였던 통일과 관련해 <민족일보>는 '중립화 통일론'을 내세우고 통일의 전 단계로 남북 교류 활성화를 주장했다. 중립화 통일론은 '미국과 소련의 타협과 보장 없이 남북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동서 평화 공존의 결과물로서 한반도 중립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세운 뒤 이를 추진하며 국제사회를 설득하자는 생각이다.

조용수 역시 특히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에 관한 사설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족일보 폐간에서 조용수의 사형까지

세를 확장하던 <민족일보>는 창간 3개월만인 1961년 5월 27일 92호 발행을 마지막으로 갑작스레 폐간됐다.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의 통고에 따른 것이었다. 조용수는 그 전인 5월 18일 <민족일보> 직원들과 함께 연행됐다.

같은 해 6월 6일 최고회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는 '최고회의가 5·16 이전이나 이후의 반국가행위, 반민족행위, 반혁명행위 등을 수사하고 심판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 6월 2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조직법'을 제정해 2심제로 운영되는 혁명재판소가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특수범죄법)'과 '부정축재 처리법' 위반 사건을 심판하도록 했다. 특수범죄법의 부칙에 '3년 6개월을 소급 적용할 수 있다'는 소급입법 조항을 두기도 했다.

조용수 등 <민족일보> 직원 열세 명은 특수범죄법 6조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1961년 7월 23일 혁명검찰부에 의해 기소됐다.

특수범죄법 6조에는 "정당·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혁명검찰부는 당시 조용수 등이 '이근영으로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지원받아 신문을 만들고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해 사회주의 노선을 밟도록 국내 혁신세력을 규합해왔다'고 주장했다.

혁명재판소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인정해 1961년 8월 28일 조용수와 안신규 상임간사, 송지영 논설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1심이 조용수를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로 본 것은 잘못이나 조용수는 정당의 주요 간부"라며 조용수 등 세 명의 사형 판결을 유지하고 다섯 명의 피고인에게 5~10년의 징역, 나머지 다섯 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1심 재판부에는 26살 이회창 씨도 배석해 있었다. 이 씨는 후일 이에 대해 "막 판사 생활을 시작한 신참이었고 혁명재판부로 차출됐는데 선배들이 그 사건에 참가하지 않으려 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혁명재판소의 판결 이후 국제언론인협회, 세계신문인협회 등에서 조용수 등에 대한 구명운동이 일었다. <워싱턴포스트>가 비판 사설을 싣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안 씨와 송 씨의 형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조용수는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됐다.

2006년 진실화해위에서 밝혀진 민족일보 사건의 진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민족일보 사건이 재조명된 것은 민주화 이후였다. 1992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진정서가 제출됐다. 1994년에는 안복희 씨가 저술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이 전국언론노동조합을 통해 간행됐다. 이어 1998년 12월 20일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정식 출범했다.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은 쉽지 않았다. 민족일보 사건은 김대중 정부가 1999년 12월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민족일보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하고 나서야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졌다.

진실화해위는 2006년 11월 "민족일보 논지만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생명권을 박탈한 것은 문명국가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에 해당한다"며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 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및 형사소송법상 재심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정 요지에는 △ 최고회의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설치법, 특수범죄법 제정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일이라는 점 △ 특수범죄법 6조에 비춰봐도 조용수는 주식회사 민족일보사의 사장일 뿐 정당이나 사회단체 간부가 아니라는 점 △ 특수범죄법의 소급적용은 형벌불소급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 등도 같이 기록됐다.

이어지는 결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기록돼 있다.

혁명검찰부에 의해 '간첩으로 민족일보에 조총련 자금을 댄 이'로 지목받은 이영근 씨는 조용수 사형 이후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0년 사망 뒤 정부로부터 '민족지 <통일일보>를 창간, 대(對) 조총련 투쟁과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는 공적으로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혁명검찰부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지목한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 교류 활성화' 주장은 당시 널리 퍼진 견해였다. 보수정당인 신민당 소장파 중에도 '중립화 통일론'을 지지한 의원이 있을 정도였다. <민족일보> 자체가 북한체제나 김일성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에 서있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받아든 조용수 유족은 2007년 4월 10일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지법은 2008년 1월 16일 이 사건 피고인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은 이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2011년 1월 13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민족일보 사건의 진실은 47년 만에 밝혀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법원으로부터 이 사건으로 인한 유족의 피해도 인정됐다. 그러나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조용수는 돌아올 수 없다. 가해자들의 사과도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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