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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 위 떨어진 비행기에 시신 아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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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일가를 태우고 소련으로 향하다 추락했다는 트리던트 운수기의 모습/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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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2회>

1971년 9월 13일 새벽 2시 30분 경 영국제 HS-121 트리던트(Trident, 삼지창) 운수기가 굉음을 울리며 몽고의 은드르항(Öndörkhaan) 부근으로 추락했다. 몽고인 목격자에 따르면 추락하는 비행기의 꼬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날이 밝자 비행기가 떨어진 초원 위엔 불에 탄 시신 아홉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파견된 몽골 외무부에 따르면 형체를 알 수 없이 짓뭉개진 시신들이었다.

아홉 구의 시신 중에서 딱 하나에서만 신분증이 발견됐다. 그 주인은 바로 당 서열 제2위로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林彪, 1907-1971)의 장남 린리궈(林立果, 1945-1971)였다. 나머지 시신의 신원은 미상이었다. 몽골 측 현장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들은 모두 50세 이하로 추정됐다. 아홉 구 중 여성의 시신은 단 하나였는데, 당시 50대였던 린뱌오의 와이프 예췬(葉群, 1917-1971)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젊어 보였다.

몽골 초원 오지에 추락한 비행기...린뱌오 사망

1971년 말, 소련의 KGB는 비밀리에 의료단을 사건 현장에 파견해서 비행기 잔해 속에서 불에 탄 린뱌오와 예췬으로 추정되는 시신의 두개골을 가져갔다. 린뱌오는 1938년-1941년 사이 모스크바에서 머리 부상의 치료를 받았다. 그 때문에 소련은 린뱌오의 진단서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측은 린뱌오의 진단서와 두개골의 특징을 비교한 후, 현장의 그 사체가 린뱌오의 시신임을 확인했다. 이후 2차 조사를 통해서 린뱌오의 시신 우측 폐부에서 딱딱하게 굳은 결핵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990년대까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중국 측 공식 문건은 비행기 추락의 원인을 연료 부족이라 얼버무린다. 소련은 기장이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하다 고도를 잘못 맞춰서 추락했다고 설명한다. 이후 연료부족, 소련 요격 설, 중국 군부의 포격 설까지 나돌았으나 추락 원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른바 “린뱌오 사건”은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 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린뱌오 사건의 진상

사건 발발 닷새 후인 1971년 9월 18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승인을 얻어 정식으로 “린뱌오 반도 출국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서두에 사건의 개요가 16자로 압축돼 있다.

창황출도(倉惶出逃), 황급히 도망을 갔지만

낭패투적(狼狽投敵), 적에의 투항에 낭패를 겪어

반당반국(叛黨叛國), 당을 배반하고 국가에 반란을 일으켜

자취멸망(自取滅亡),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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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초기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중공 서열 1위와 2위로 중공중앙과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손발을 맞춰 가며 정국을 주도했다./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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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및 증거 조사에 따르면,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극비리에 “삼지창”(트리던트) 운수기에 오를 때 수년 간 그를 보위한 경위원을 쏴죽이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몽골 너머 소련을 향했다. 린뱌오의 목표는 소련 수정자본주의에의 투항이었다. “확실한 소식통에 따르면, 국경을 지난 비행기는 몽고의 은드르항 부근에서 추락했다.” 이어지는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린뱌오는 장시간에 걸쳐 ‘반당반국’을 계획했다. 특히 중앙 9기 2차 전체회의(1971.8.23-9.6) 이후 계급투쟁과 두 갈래 노선투쟁이 시작됐다. 그 결과 린뱌오라는 이 자본주의 야심가, 음모가의 정체가 다 폭로되었고, 그는 총 파산을 맞았다. 9기 2차 전회에서 국민당의 오랜 반동분자, 트로츠키주의자, 반도, 특수간첩, 반혁명 수정주의분자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감히 그토록 미치광이처럼 공격해댔다. 그의 반당, 반9대(9차 전국대표대회, 1969.4.1.- 4.24), 반(反)마르크스-레닌주의, 반(反)마오쩌둥사상의 검은 배후는 바로 린뱌오였다. 천보다 노선은 실제로는 린뱌오-천보다 노선이었다”.

1971년 10월 6일 중공중앙은 “중발[1971]65호”에서 다시금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및 군구의 조직에 린뱌오의 사태를 규탄했다. 이 통지문에서 중공중앙은 “9차 전국대표대회(1969.4.1.-4.24) 이래, 특히 9기2차 전회부터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을 영수로 하는 무산계급사령부와 린뱌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 사이의 투쟁이 지속됐다”고 규정했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당내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구축한 린뱌오는 그의 아들 린리궈의 조직를 통해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 등지에 비밀 파시스트 특무 조직을 만들고 “여론을 조작하고, 특수간첩을 훈련하고, 간부들을 매수하여” 반혁명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또한 그들은 마오쩌둥이 남방을 순시할 때 상하이 부근에서 열차에 폭약을 설치해서 암살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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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일가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딸 린리헝, 부인 예췬, 린뱌오, 아들 린리궈/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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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지시에 따른 암살인가

물론 중공중앙의 공식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당시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그늘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국공내전의 영웅이었다. 만주 전역에서 그는 다섯 달 동안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철조망으로 에워싸고 수많은 민간인을 꼼짝없이 굶어죽게 만드는 잔인한 포위전으로 만주에서 국민당을 패주시킨 주인공이었다. 여세를 몰아 린뱌오는 베이징과 천진을 함락했고, 최남단의 하이난다오(海南島)까지 진격하는 극적인 무훈(武勳)을 세웠다. 그 결과 린뱌오는 1955년 “중국 10대 원수(元帥)”로 추대됐다. 당시 그는 주더(朱德, 1886-1976)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에 이어 군 서열 제3위로 꼽히는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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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에서 건국 10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거행하는 국방부장 린뱌오/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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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루산(廬山)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고 직간(直諫)했던 당시 국방장관 펑더화이를 파면하고, 대신 신경쇄약으로 대외활동을 접고 있던 린뱌오를 급히 불러와 국방장관에 앉혔다. 이후 린뱌오는 마오쩌둥에 절대적 충성으로 보은했다. 1960년대 초반 린뱌오는 군대를 앞세워 전국의 마오주석 인격숭배의 열풍을 이끌었다. 문혁 시기 린뱌오는 승승장구했다. 1966년 8월 1-12일 개최된 중공 제8기 11차 전체회의에서 린뱌오는 류샤오치를 대신해서 당 서열 2위에 올랐다.

1969년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린뱌오는 공식적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이미 지난 회에서 다뤘듯 린뱌오는 “국가원수”의 직위 존폐와 “마오쩌둥 천재론”을 둘러싸고 마오쩌둥과 부딪히긴 했다. 마오쩌둥은 천보다를 파면시킴으로써 린뱌오를 구석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설마 당 서열 2위의 린뱌오가 군사정변을 기획했을까? 80세를 바라보는 마오쩌둥을 축출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

게다가 린뱌오는 1969년 3월 소련과의 군사충돌을 배후에서 지시했으며, 공개적으로 소련을 규탄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었다. 그런 린뱌오가 어떻게 소련으로의 망명을 꾀할 수 있나? 중공중앙의 발표는 상식적으로 납득되기 힘들었다. 확증은 없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그날의 비행기 사고가 마오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 추측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린뱌오, 마오쩌둥을 제거하려 했나

가령 1983년 5월 8개국에서 동시 출판된 야오밍러(Yao Ming-le, 가명)의 <<린뱌오의 음모와 죽음(The Conspiracy and Death of Lin Biao>>에 따르면, 중공중앙의 공식발표는 진상을 가리는 연막에 불과했다. 허술한 군사반란의 “571공정” 계획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와 그의 동료들이 짰다. 이들과 달리 린뱌오는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또 한 번의 중·소 무력충돌을 일으킨 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지하 벙커 “옥탑산(玉塔山)”에 대피시켜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 전국적인 반(反)마오쩌둥 캠페인을 벌이려 했다. 반란 음모를 미리 알아낸 마오쩌둥은 린뱌오 부부를 베이징 서부의 빌라에 초대한 후 그들의 차량을 폭파했고, 다음날 급히 소련으로 도망하던 린리궈의 비행기는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추락한 비행기 속엔 린뱌오와 예췬의 시신이 없었다는 몽골 측 최초 조사와 일치한다.

이 책의 근거에 관해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책의 저자가 소련 KGB 혹은 타이완 정보부의 요원이란 설도 있었고, 중공중앙의 요원으로 중국 공군과 연결된 인물이란 설도 있었다. 다만 천재 전략가 린뱌오가 대역(大逆)의 군사반란을 기획하는데 그토록 허술했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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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야오밍러의 “린뱌오의 음모와 죽음”/ 공공부문>


때문에 “571” 군사반란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이 몇 개월 전에 기획했으며, 린뱌오는 자신의 아들 린리궈에 납치된 상태였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당시 린리궈는 린뱌오의 오른팔 우파셴(吳法憲, 1915-2004)의 도움으로 공군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공군 내 그의 직위는 사령부 부주임이자 작전 부(副)부장이었는데, 중요한 문서를 모두 살펴 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린리궈는 마오쩌둥과의 권력 투쟁에서 아버지 린뱌오가 큰 위기에 봉착했음을 감지했다. 린뱌오에 대한 공격은 곧 집안 전체의 몰락이라 생각한 린리궈는 공군 내부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군사반란의 밀모(密謀)를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린리궈의 약혼녀 장닝(張寧, 1949- )과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 1944- )의 증언에 따르면, 린뱌오와 예췬은 문제의 9월 12일 마오쩌둥의 만찬에 불려간 게 아니라 베이다이허(北戴河)의 요양지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중공중앙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아버지 린뱌오의 안전을 걱정한 린리헝은 저우언라이에게 그들의 도주 계획을 알렸다. 그 결과 린씨 일가가 급하게 도주하는 비행기에 모종의 폭약이 장착됐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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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 1944- )의 모습. 왼쪽 사진은 린리헝과 저우언라이(1966), 오른쪽 사진은 마오쩌둥에 경례를 올리는 린리헝의 모습 (1965)/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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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 “린뱌오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린뱌오 사후 4인방은 “반도 린뱌오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꺼져가는 문혁의 불길을 다시 당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결탁된 군부의 이른바 “린뱌오 집단”을 일제히 소탕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대한 중앙군사위원회의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980년 덩샤오핑은 “심판 린뱌오-장칭 반혁명 사건”의 재판을 통해 4인방과 동급으로 린뱌오 집단의 생존자들을 단죄했다.

린뱌오의 죽음, 문혁의 음모정치 폭로하는 계기

린뱌오는 그렇게 역사의 악인으로 폄훼됐지만, 허망한 그의 죽음 뒤엔 변화의 불씨가 뒤따랐다. 그 당시를 살았던 다수 중국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급작스런 린뱌오의 추락은 그들을 혁명의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문화혁명이 음모 정치, 권모술수로 범벅된 저열한 권력 암투임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술렁이는 여론을 되잡기 위함이었을까. 1970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은 린뱌오 집단이 직접 작성했다는 “571 공정 기요(紀要)”를 전국에 배포했다. 린뱌오 집단의 군사반란 계획서인데, 그 안엔 이 집단의 정치적 의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문혁의 절정에서 작성됐다는 군사반란의 계획서를 깊이 뜯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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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이 공개한 “571공정 기요”의 이미지. 이 문서는 린뱌오 집단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작성한 구체적인 혁명의 기획안이었다./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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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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