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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마네는 왜 드가가 선물한 부부 초상화를 칼로 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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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앵글북스 서배스천 스미가 쓴 '관계의 미술사'.


관계의 미술사

서배스천 스미 지음|김강희·박성혜 옮김|앵글북스|440쪽|2만2000원

일본 기타쿠슈 시립미술관에는 드가가 1868~1869년 그린 마네 부부 초상화가 소장돼 있다. 드가는 소파에 널브러져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마네와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 수잔을 그려 마네 부부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림 속 수잔의 얼굴도, 피아노도 볼 수 없다. 그림 오른쪽 부분이 칼로 잘려나갔기 때문. 그림을 훼손한 사람은 바로 마네다. 온화한 성격의 마네가 왜 이런 돌발 행동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림을 선물하고 얼마 후 마네의 작업실을 방문한 드가는 충격에 휩싸여 자리를 떴다. 그는 회상했다. “나는 작별 인사 없이, 내 그림을 가지고 나왔다.”

이 책은 질투에 대한 이야기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질투가 어떻게 성장의 연료가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매혹과 경쟁에 대한 이야기이며, 발전과 성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제는 ‘The Art of Rivalry(경쟁의 기술)’. 퓰리처상 수상자로 워싱턴포스트 미술 비평가로 활동 중인 저자 서배스천 스미(49)는 “미술사엔 교과서가 외면하는 친밀감의 영역이 존재한다 믿는다”고 말한다.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르 드가,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잭슨 폴록과 빌럼 더 코닝, 루치안 프로이트와 프랜시스 베이컨 등 서로의 초상화 모델이 되어주고 작품을 교환하며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친구이자 라이벌로 지낸 네 쌍의 남성 화가 이야기를 경쾌하면서 우아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예술가들은 서로를 자극하고 부러워하며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 ‘독창성’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훌쩍 뛰어오르는데, 이러한 감수성은 초년생 시절에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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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꼼꼼한 모범생’이었던 드가가 1868~1869년 그린 마네 부부 초상. 마네는 이 그림의 오른쪽 부분을 칼로 잘라버렸고 이후 드가가 빈 캔버스를 덧붙였다. 오른쪽 사진은 위트 있는 필치가 특색인 마네의 1870~1871년작‘휴식’. /앵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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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 아들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마네와 드가는 빛과 그림자처럼 달랐다. 마네가 ‘쿨한 천재’라면 드가는 ‘우직한 모범생’이었다. 마네가 단숨에 그리고 전통적 개념의 ‘마무리’를 무시해버리는 식이었다면, 드가는 자신이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가닿기까지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나갔다. 유부남인 마네는 혼외 관계까지 즐겼지만 드가는 평생 독신이었고 예술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금욕에서 나온다 믿었다. 극과 극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1861년 서른 살을 막 앞두고 있던 마네는 루브르박물관 전시실을 어슬렁거리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는 스물예닐곱 무렵의 드가를 만난다. 이미 파리의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새 시대를 열어갈 선구자’로 추앙받던 마네는 그림에 대해 조언하다 드가와 가까워진다. 신화와 역사에 골몰하던 드가가 동시대적 주제로 눈을 돌리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마네였다.

드가는 마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휘둘리진 않았다. 남자들과 함께 나신으로 피크닉을 즐기는 여인을 그린 ‘풀밭 위의 점심’, 성매매 여성의 누드를 그린 ‘올랭피아’ 같은 대담한 그림으로 주목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데 지친 마네가 1867년 런던 여행을 제안했을 때, 드가는 이를 거절하고 3년 뒤 혼자 런던으로 가서 크게 성공한다. 저자는 마네가 드가의 그림을 칼로 그어버린 것은 권태의 늪에 빠져있던 자신의 부부 관계를 매섭게 꿰뚫어보고 화폭에 담아내는 그 재능에 대한 불편함과 질투 때문이라 해석한다.

야수파의 선구자 마티스에게 열 살 아래 피카소는 어쩐지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젊은 놈’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야수 중의 야수’로 불리던 마티스에 비하면 파리 화단에서 한참 뒤처져 있었지만, 마티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추종자가 되길 거부한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이를 자신만의 화풍으로 발전시켜 입체주의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완성한다. 그림을 처음 본 마티스는 “친구의 작품에서 보이는 약간의 대범함은 누구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비꼬았지만 결국은 입체주의에 동참한다. 마티스는 시인 아폴리네르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라이벌의 강점을 흡수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마침내 홀로 서는 거장들의 리그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어디 예술가뿐이랴. 우리는 모두 가까운 타인으로부터 영향받고 타인의 탁월함을 시기하면서 배우며, 그중 노력하는 자는 그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저자는 “굴복하고, 방향을 틀고, 극복하고, 다시 더 굴복하는 이 유명한 패턴은 마치 두 예술가가 예술이라는 무대에서 일련의 교묘한 책략을 펼치며 무술 대결을 보이는 모습처럼도 보인다”고 썼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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