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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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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바실리 페로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Portrait of Fedor Dostoyevsky)>, 1872, 80.5×99㎝, The State Tretyakov Gallery,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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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10년 전, <뉴욕 타임스>의 미치코 가쿠타니는 새로 나온 찰스 디킨스 전기의 서평을 썼다. 글은 그녀가 책에서 꽤 인상적으로 읽은 일화로 시작한다. “1862년 런던에 들른 도스토옙스키는 디킨스를 방문했다. 대화 중 디킨스는 털어놓았다. “내 속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마땅히 가져야 할 도덕을 지닌 자이고, 또 한 사람은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전자는 내 삶에 지침을 주고, 후자는 사악한 등장인물의 소재가 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반문했다. “단지 두 명뿐이라고요?””

도스토옙스키 연구자들은 이 일화에 별로 감명받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뉴욕 타임스>에 편지를 보내 이 금시초문인 이야기의 출처를 검증해달라고 요구했다. 당황한 <뉴욕 타임스>는 기사의 인터넷판에 이 일화의 진정성이 논란이 되는 중이라고 주를 달았다. 역시 당황한 디킨스 전기의 저자는 이 일화를 학술지 논문에서 봤으며, 이를 재인용한 연구자는 자기뿐이 아니라고(이미 두권의 디킨스 연구서에도 들어갔다) 밝혔다. 물론 저자는 이 일화가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고 인정했다. 문제의 논문은 2002년 디킨스 학회지에 투고된 것이었는데, 필자의 신원은 불확실했다. 이리하여 학술 세계에서 보기 힘든 탐정 놀이가 시작되었다. 이 기이한 사건의 전말은 2013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실려 있다. 한마디로 서두의 디킨스-도스토옙스키 회동은 완전히 허구다. 창작자는 노년에 접어든 무명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임이 밝혀졌다. 그는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논저와 소설들을 찬양할 목적으로 십여개의 필명을 지어내 서평을 투고해왔다. 별 성과가 없었다는 점만 빼면 수십년간 이 불장난은 딱히 위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를 곁가지로 ―왜 그랬을까?― 건드리면서 그는 꼬리가 밟히게 되었다.

공론의 장에 유통되는 가짜 인용구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꽤 많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가짜 인용구를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일은 간단하지만, 이를 논문에 넣어 학술지의 심사를 통과하는 것은 최고난도의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방법을 궁리하면 불가능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예컨대 위조자는 자기가 투고할 학회지의 영문학자들이 러시아어를 모르고, 러시아어 문헌 출전을 확인할 리도 없다고 예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리고 그는 영문학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나 성격에 대해 별 지식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좀 아슬아슬한 도박이지만 이 예상도 맞았다. 반면 러시아 문학자들은 단박에 디킨스-도스토옙스키의 회동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록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도스토옙스키처럼 상대하기 힘든 성품의 사람이 다른 작가와 저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았다. 위조자는 도스토옙스키와 관련한 불장난이 러시아 문학자들 눈에 띌 경우 닥칠 위험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논문 제목에는 도스토옙스키를 넣지 않는 조심성을 보였다. 탈이라면 이게 인기가 좋은 바람에 여기저기 인용되어버린 것이다.

가짜 인용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본인이 읽고 확인한 구절만 인용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건 시간과 노력이 꽤 드는 일이다. 급한 대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진 않다. 인용구 앞뒤에 ‘흔히 말해지는 바에 따르면’ ‘어디에 뭐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던데’ 등의 말을 첨가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채로 남긴다. 딱히 동조하는 인상도 주지 않는다. 그럴 거면 인용을 왜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중에 본인이 체면을 구기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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