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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말기 암환자에게 희망 준 홍란, "골프는 애인과 밀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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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DB한국여자오픈서 1천라운드 달성
KLPGA투어 역사상 최초..17시즌 연속 활동
대회 최다 출전. 대회 최다 예선 통과 기록도


파이낸셜뉴스

18일 충북 음성군 레인보우힐스CC에서 열린 DB그룹 한국여자오픈 2라운드를 마치면서 KLPGA투어 최초로 1000라운드 신기록을 수립한 홍란. /사진=DB그룹 제35회 한국여자오픈 대회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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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시한부로 삶을 연명하던 50대 후반의 한 말기암 환자가 있었다. 평소 골프 마니아였던 그가 몹쓸 병에 걸리게 되면서 한 선수를 열렬히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철녀' 홍란(35·삼천리)이었다. 그에게 "젊은 선수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은퇴를 앞둔 홍란을 좋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아왔던 현역 생활을 언제 마감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늘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나도 꼭 병마를 이겨내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3년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당시 제주도에서 열렸던 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던 홍란에게 들려 주었다. 그러자 홍란은 대뜸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꼭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길 기원하겠습니다'라는 응원 메시지를 꼭꼭 눌러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싸인을 곁들인 모자를 꼭 전달해달라고 했다.

지금도 그 모자를 받고 마치 어린 아이 마냥 좋아하던 그 환자의 모습이 생생하다. 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19년에 58세의 나이로 우리들 곁을 떠났다. 당시 유가족들과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홍란의 응원이 그가 생명을 조금 더 연명하는 힘이 됐다고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몇 개월 뒤 대회장에서 만난 홍란에게 늦은 부고를 했다. 서로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알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식을 접한 홍란은 깜짝 놀라며 "꼭 이겨내시길 바랬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런 홍란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최초로 1000라운드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18일 충북 음성군 레인보우힐스CC에서 열린 DB그룹 한국여자오픈 2라운드를 마치면서다. 이날 6타를 잃어 이틀간 10오버파로 컷 통과가 사실상 무산되면서 기대했던 그림은 아니지만 그는 그 기록만으로 3년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열렬한 팬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만은 분명하다.

홍란이 KLPGA투어에 데뷔한 것은 2005년이다. 첫 라운드는 그해 2월 삼성 레이디스 마스터즈에서였다. 이후 올해까지 17년간 한 번도 시드를 잃지 않았다. 투어 최다 연속 시드 유지 기록이다. KLPGA 투어 두 번째 300경기 출전 돌파에 이어 최다 대회 출전(341개 대회), 최다 예선 통과(279회) 등의 기록을 쓰고 있다.

통산 우승은 4승(2008년 MBC투어 레이크사이드 여자오픈, KB국민은행 스타투어 2차 대회, 2010년 에쓰오일 챔피언스, 2018년 브루나이 레이디스 오픈)으로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롱런으로 보여준 성실함은 그 어떤 우승보다 더 값지고 빛난다. 17시즌 연속 시드 유지와 1000라운드 경기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대기록이다.

이는 젊은 후배들과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자신의 각고의 노력과 9년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후원사의 전폭적 지원의 결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홍란과 후원사 삼천리는 선수와 후원사 관계라기 보다는 '가족'과 같은 동반자에 더 가깝다. 그만큼 양자간에 신뢰와 배려가 두텁다는 얘기다.

홍란은 전인미답의 1000라운드를 마친 뒤 "아직도 마음은 신인인데 1000라운드를 뛰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데뷔할 때는 이렇게 오래 할 줄은 예상 못 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꿋꿋하게 버텼더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건 연습보다는 체력 훈련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란은 "많은 후배가 내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어서 앞으로 1000라운드를 넘어 2000라운드까지 해냈으면 좋겠다"면서 "1000라운드라는 큰 기록을 세운 것은 좋지만 선수로서 성적이 좋지 않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주변의 많은 축하 인사에 젖어 선수로서 나태해진 게 아닌가 반성했다. 다음 대회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골프는 밀당을 잘하는 애인과 같은 것 같다. 알 것 같다가도 남 같다. 1000라운드를 했으니 알 만도 한데 라운드할 때마다 새로운 걸 깨닫는다"고 그토록 오랫동안 해온 골프지만 아직도 어려움은 어쩔 수 없음을 내비쳤다. 참고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최다 출전 기록은 요시카와 나요코가 보유한 767경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는 베시 킹이 갖고 있는 758개 경기다.

golf@fnnews.com 정대균 골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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