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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병수의마음치유] 고난을 견뎌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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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던져준 문제들 집착할수록 더 고통

변화에 대한 믿음 잃지 않고 심신 단련해야

세계일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을 땐 어떻게 할까? 자신을 싫어하는 직장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하거나 어느 날 난치병을 진단받는다면? 오래 묵은 부부 불화에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목돈은 없는데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을 그저 지켜봐야만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땐 울어야 할까? 운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변화를 초래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몸을 움직이는 존재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면 꼼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삶을 덮치면 잠만 자고 싶어지는 것이다. 깨어 있어 봤자 달라질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회피는 고난이 닥쳤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거나 언젠가 끝난다는 걸 알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 때 무작정 잠으로 도망치거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꼼짝 않으면 삶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다.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것은 ‘내가 움직여 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 갇혀 일상적 활동을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괴로운 상황에 우울증까지 겹치면 정말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운동으로 자기를 단단하게 단련해야 한다. 이것이 통제하기 어려운 고난 앞에 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태도다. 2004년 군의관이었던 나는 이라크전쟁터로 파병되어 근무한 적이 있다. 부대에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체육관이 있었다.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수제받침대 위에 놓인 역기를 비롯한 몇 가지 운동기구들이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그곳이 병사들로 꽉 찼다. 운동열기가 대단했다. 그때 군인들은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전투를 위해 몸을 단련했던 것일까? 대의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된 파병지에서 벗어나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잊기 위해 그저 몸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래야 현실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생각에 집착할수록 정신적 고통은 커진다. 삶이 던져준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고민만 하고 있으면 무력감은 더 커진다. 이럴 땐 신체를 단련하며 시간을 다스려야 한다.

“이 모든 상황에서 영웅적 행위는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은 품위의 문제예요. 이 말을 들으면 몇몇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페스트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품위를 잃지 않는 겁니다.” 소설 ‘페스트’에 나오는 문장이다. 스트레스 상황 안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품위는, 파랗게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기보다는 기도하고 친구와 수다 떨고 목욕을 하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도 글을 쓰고 대화하는 것은 하루도 놓치지 않았다.

삶은 변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이 있게 마련이다. 끝나지 않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 사건에 의해 반드시 상황은 바뀐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다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그런데도 변화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루, 아니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을 견디는 최고의 방법이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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