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시계 선물인 줄 알았는데…" 국제보고서에 등장한 韓 '몰카 성범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머니투데이 박가영 기자] # 직장인 이예린(가명)씨는 유부남 상사에게 탁상시계를 선물 받았다. 평소 이씨에게 치근덕대던 상사였다. 이씨는 선물 받은 시계를 처음에는 침실에 뒀다. 이후 시계에서 나오는 불빛이 거슬려 다른 장소로 옮겨뒀다. 시계 위치가 바뀌자 상사는 갑자기 시계를 원치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상사의 말에 수상한 낌새를 느낀 이씨는 시계 기종을 인터넷에 검색했고, 시계에 몰래카메라가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사가 이 시계를 통해 이씨 방을 휴대전화로 24시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를 발견한 이씨가 따져 묻자 상사는 이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그거 검색하느라 밤새운 거냐"고 물었다.

상사는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씨의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도 우울증 및 불안증 약을 복용 중이다. 이씨는 "밤새도록 울었다. 불면증에 시달려 약을 먹어야 했다"며 "이건 내 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상 생활을 하다가도 종종 내 방이 이유 없이 무서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공개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보고서 /사진=HRW 홈페이지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국 디지털 성범죄 실태를 담은 보고서에 등장하는 피해 사례 중 하나다. HRW는 지난 15일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디지털 성범죄를 겪고 '생존'한 12명의 피해 여성과 정부 관계자, 민간 전문가 등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다. 로이터는 이 보고서 내용을 전하며 "한국은 전 세계 불법 촬영의 중심지(global epicentre of spycam)"라고 보도했다.


한국만 꼭 집은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 …"성 평등 의식 부족"

96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한국 한 곳만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보고서를 발표한 헤더 바 HRW 여성권리국 공동국장 대행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문제다. 불행히도 한국은 해당 분야의 선두 자리에 있다. 화장실이나 탈의실 몰래카메라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같은 촬영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의 사례에 집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불법 촬영으로 기소된 사건은 10년 새 11배 늘었다. 2008년 한국에서 기소된 성범죄 사건 중 4%인 585건이 불법 촬영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는 2017년 6615건으로 급증했으며 전체 성범죄의 20%를 차지했다. 불법 촬영 피해자의 80%는 여성이고, 가해자의 압도적 다수는 남성이었다. 2016년에는 불법 촬영 사건의 가해자 98%가 남성이었다고 HRW는 전했다.

HRW는 한국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게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성 평등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현재까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기적을 이룬 나라다. 이 발전의 일환으로 성인의 스마트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인터넷 속도도 가장 빠르다"며 "그러나 경제 및 기술 발전이 성 평등 의식의 발전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성 불평등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지적했다. HRW는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 2021'을 인용해 양성평등 수준을 나타내는 성 격차 지수(GGI) 순위에서 한국이 156개국 중 102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유독 디지털 성범죄에 약한 한국 사법부

머니투데이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HRW는 이러한 성 불평등 문제가 사법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봤다. 바 국장은 "한국의 형사사법제도 공무원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매우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살인사건과 강도사건의 불기소율은 각각 27.7%, 19%였는데, 디지털 성범죄 사건은 43.5%에 이르렀다.

기소가 돼도 형량은 낮다. 지난해 불법 촬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중 79%가 집행유예나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쳤다.

최지은(가명)씨는 2018년 자신의 집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입었다. 낯선 남성이 근처 건물의 지붕에서 2주간 최씨를 불법 촬영한 것이다. 가해자의 촬영 장비를 압수해 분석한 결과 최씨 외에도 7명의 다른 여성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가해자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근에 결혼했고 직업이 있으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게 양형 이유가 됐다. 최씨는 "가해자는 감옥도 가지 않고 벌금도 내지 않은 채 예전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물 완전 삭제 어려워…"고문 같았다"

머니투데이

/삽화=김현정 디자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HRW는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관련 촬영물이 신속하게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강유진(가명)씨는 텀블러 등 웹사이트에 자신의 얼굴과 속옷 사진, 직장 및 거주지의 주소 등 개인 신상 정보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포자는 4년 연애 끝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그는 강씨의 사진 등 정보와 함께 '파트너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게시물은 퍼졌고, 가해자가 적어 놓은 주소를 보고 집으로 찾아온 남성들도 있었다.

강씨는 당시 가장 어려웠던 일 중 하나가 수많은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가해자가 올린 게시물을 직접 캡처해서 증거를 수집하고 게시물 하나하나마다 삭제 요청을 해야 했다. 게시물 여러 개를 한 번에 삭제하지 못하고 하나씩 처리해야 해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 힘들었다"며 "정말 고문이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하루 종일 삭제 요청만 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유포된 촬영물 삭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해마다 도움을 요청하는 고객 중 4명가량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문제 해결 위한 제언

HRW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조치 중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주목했다. 피해자를 돕기 위한 센터 설립은 다른 나라들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센터 사무실이 서울에만 있어 다른 지역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고, 직원 상당수가 임시직이라 근속기간이 짧아 전문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현재 양형과 구제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더해 자료 삭제 지원, 법률 및 심리·사회적 지원 등 피해자를 위한 모든 서비스 제공을 위해 충분한 기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국회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삭제 등 피해 복구 비용을 손쉽게 청구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찰, 검찰, 법원 등 수사·사법 기관에는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성폭력 교육을 진행하고, 각 기관 고위직 및 디지털 성범죄 담당 부서에 여성의 수를 늘릴 것을 촉구했다.

박가영 기자 park0801@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