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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상언의 시시각각] 세상 일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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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본질에 접근하지 않고

피상적 관심과 의지만 나타내면

김학의 사건 같은 결과가 빚어져

중앙일보

지난 10일 서울구치소에서 나오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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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결과가 민망한 일들이 있습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이 그중 하나입니다. 대통령 분부에 따라 재조사와 재수사가 진행됐습니다. 기소되고 재판이 열려 당사자가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지체됐지만 ‘정의’가 구현된 것처럼 보였는데 사태가 이상하게 흐릅니다.

김 전 차관은 며칠 전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하면서 보석을 허가했습니다. 또 한 차례 재판이 진행되겠지만, 그가 다시 수감될 가능성은 매우 작습니다. 반면에 그 정의 실현에 나섰던 검사, 법무부 고위 간부, 청와대 비서관 등이 줄줄이 처벌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죄인과 포졸의 위치가 한순간에 뒤바뀌었습니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김 전 차관 사건 내용을 어느 정도 아는 주변의 법조인과 기자는 대통령 말이 나왔을 때 그리 쉽게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문제의 동영상 속 남성이 김 전 차관이 아니라고, 그가 벌 받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또는 못한) 나름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사정은 이 사건이 성폭행이냐, 아니면 성 접대냐는 기초적 성격 판단부터가 어렵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최근 한 언론은 ‘회색지대’에 놓인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찰은 특수강간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성폭행이 되려면 피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명확한 피해자 진술이 없었습니다. 성 접대가 되려면 접대에 동원된 성매매 여성이 존재해야 합니다. 관련 여성들이 성매매를 부인했습니다. 현 정부 출범 뒤에 만들어진 재조사 위원회는 두 개의 보고서를 병렬로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하나는 성폭행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매매로 보는 것입니다. 위원회가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검찰은 첫 수사 때 그 사건이 발생한 별장 주인인 윤중천씨와 김 전 차관의 금전 거래를 추적했어야 했습니다. 결과론이긴 합니다. 검찰에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된 것은 별장에서의 성폭행(경찰 등의 주장)인데 그것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돈 문제를 밝히겠다며 계좌추적을 벌이는 것은 원론적으로 ‘별건 수사’입니다.

여하튼 재수사를 거쳐 검찰이 김 전 차관을 기소했고, 유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해당 죄는 윤씨나 동영상 속 사건과는 무관했습니다. 다른 이에게서 돈을 받은 게 문제가 됐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는 데 검사의 윤씨 면담 내용 과장 보고, 불법 출국금지, 무리한 기소(법원에서 대부분 불인정), 재판 직전 검사의 증인 접촉(대법원의 원심 파기 사유)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하나둘 드러난 것입니다.

법을 잘 아는 검사와 법무부 간부들이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조직 생활’ 경험자들은 직감하는 게 있습니다. 결정권자가 관심과 의지를 보이면 아랫사람이 “그게 좀 복잡합니다” 이런 말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리해서라도 뭔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 결정권자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 건을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방향이 다른 의견도 필요합니다. ‘본질’에 접근하는 과정입니다.

부동산·원전·백신 문제 모두 비슷합니다. ‘정인양 사건’ 뒤의 국가 입양 관리·감독 강화 지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양 실무에 밝은 한두 사람만 불러 물어봤다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한 발상의 대책인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밝힌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회고록 『온 아워 웨이(On Our Way)』를 보니 그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각료·참모·전문가들을 모은 뒤 함께 장시간 회의하는 모습이 빈번히 나옵니다. 해당 사안의 반대론자도 부릅니다. 그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앙일보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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