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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분수대] 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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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어떤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뜻의 하청(下請)은 일본식 표현이다. 법률에서는 하청 대신 하도급이란 표현을 쓴다. 그러나 건설·산업현장에서는 하청이란 말이 더 널리 쓰인다. 원청(元請)과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갑을 관계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청업체의 갑질 논란이 나올 때마다 ‘하청업체=피해자’라는 공식이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하청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원청업체의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다양한 업체와 협업을 통해 기술과 품질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불합리한 대우를 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비용을 아끼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 약자인 하청업체를 쥐어 짜낸다면, 품질뿐 아니라 안전 문제까지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건설현장에서 다단계 하도급을 원칙적으로 금지(건설산업기본법 제29조)하고 있는 이유다.

현장에서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참사가 벌어졌다. 지난 9일 광주에서는 재개발 구역 5층짜리 건물이 무너졌다. 건물은 대낮 평온한 도심 도로에 거짓말처럼 비스듬히 쓰러졌다. 건물이 쏟아져 내린 도로 위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붕괴 당시 정류장엔 버스가 정차 중이었다. 버스 안에 있던 탑승객 9명이 숨지고, 8명이 다치는 참사로 이어졌다.

해당구역 재개발 조합·시공사와 계약을 맺은 철거업체는 또 다른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이 업체는 더 영세한 업체와 다시 계약했다. 현행법을 어긴 전형적인 다단계식 재하도급이다. 2차, 3차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공사비는 쪼그라들어 저비용 고위험 구조로 변질한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킨 업체는 건물을 빨리 허물기 위해 맨 위층부터 허무는 당초 계획을 변경해 아래층에 먼저 손을 댔다.

어머니 병문안을 가던 딸, 큰아들 생일상을 차려주고 일터로 향한 어머니, 수업 후 귀가하던 고등학생까지… 참변을 당한 시민들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들의 허망한 죽음은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다. 불법 하청이 만연한 왜곡된 철거 생태계를 깨끗이 철거하는 일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부랴부랴 때늦은 대책을 쏟아낸다. 관련자 처벌과 제도 개선 여부를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봐야 한다. 관심과 감시는 우리의 몫이다. 여기엔 하청이 없다.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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