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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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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대통령 뜻,'선택적 존중'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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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소송 해결은 부지하세월

사법부가 못하는 일 푸는 게 정치

대통령은 정치 정점에 있는 사람

중앙일보

지난 7일 강제징용 소송에서 각하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소송단 대표와 유족이 기자들에게 항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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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강제징용 1심 판결 논란이 거세다. 이 글은 2018년 대법원 판결과 지난주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 가운데 어느 것이 잘됐고, 뭐가 그른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황희 정승처럼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법률 비전문가인 필자가 의견을 제시한들 분분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권위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법률가 출신인 집권당 대표와 전직 법무장관이 “조선총독부 판사냐”며 다시 친일 프레임에 불을 붙였고, 청와대엔 해당 법관에 대한 탄핵 청원까지 올라갔다. 법리 논쟁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신공격이자 법관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그들은 이런 언행이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했다. 문 대통령은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 전가의 보도처럼 ‘사법부 판단 존중’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여당이나 자신의 지지층에 대해 다시 한번 “판결을 존중하라”고 강조해야 한다. 대통령의 진의가 마음에 드는 판결만 편드는 ‘선택적 존중’이 아니라면 말이다. '테스형'이 악법도 법이라 했듯 내 맘에 들건, 안 들건 판결은 판결인 것이다. 모든 판결은 존중돼야 한다. 그게 법치다. 그런데 판결과 판결이 모순된다. 이럴 때 선택적 존중의 유혹에 빠지면 법치는 반쪽짜리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사법부 판단 존중이란 원칙만으론 징용문제를 풀 수 없다는 점이 이번 판결의 교훈이다. 1심 판결과 이후 동향으로 보건대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모든 판사가 동의하는 불가촉·불가변의 진리는 아님이 드러났다. 법리적 견지에서는 이번 1심 판결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을 가진 판사나 법조인·학자도 많다. 그런 의견을 실명으로 적극적으로 밝힌 사람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2018년 대법원 판례를 깨는 판결이 나올 개연성은 처음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란 얘기다. 설령 지난주 1심 판결이 대법원으로 올라가 또 뒤집힌다 해도 마찬가지다. 다른 피해자 유족들이 제기해 1심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유사 소송이 두 자릿수라니 엇갈리는 판단이 다시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모든 유사 소송의 최종심이 종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라”고 일갈하면 법적 혼란은 해소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 부지하세월로 지체될 피해자 구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우는 또 다른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도 반한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소송 제기 후 13년이 걸렸지만 강제집행 절차가 완료돼 원고들의 손에 위자료가 들어가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확정판결이 난 재판조차 그러할진대 이제 갓 재판이 시작됐거나 혹은 소송을 내려고 준비 중인 유족들은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그사이 회복 불능에 가깝게 깊어질 일본과의 외교 갈등은 또 어떻게 풀 것인가. 일본 정부는 이번 1심 판결을 보라며 더더욱 대법원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틸 것이다.

세상만사 중에는 3심제 판결로 모든 분란을 잠재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있다. 솔로몬이 와도 못 풀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강제징용이 바로 그런 문제일 것이다. 정부는 진작부터 적극적 자세로 정치·외교로 풀었어야 했다. 그걸 사법부에만 맡긴 건 정부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다. 사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특별법 입법을 통해 피해자 구제를 신속하고 일률적으로 하되 그 재원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어떤 입장을 보이고, 어떻게 참여할지는 외교의 과제다. 설령 모든 당사자를 다 만족시키진 못하더라도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것이 정치다. 미흡한 점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차선을 선택한 데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사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푸는 것이 정치고, 대통령은 정치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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