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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차별을 “차별”이라 말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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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웹 홍보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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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정민석 |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인권이 있다고?” 17년 전 에이치아이브이/에이즈(HIV/AIDS) 인권단체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윤가브리엘에게 들었던 말이다. 당시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손사래 쳤던 그는 그사이 다국적제약회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에이즈 혐오자들이 주관하는 행사 한가운데서도 규탄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하는 투사가 되었다.

10년째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케이엔피플러스(KNP+) 자조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손문수는 처음 확진을 받았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랑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감염인 동료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며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감염인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만 빨간색 주사기 표시를 해둔 것을 보고 차별이라고 생각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였고,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료기관 문턱을 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꾸준히 문제제기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HIV 감염인이다. 그리고 차별당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차별당했을 때 느끼는 억울한 감정을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고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된 지 1년이 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발의된 이 법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감염인에 대하여 진료를 거부하거나 차별적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법률 개정안에 대해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질병관리청은 한발 더 나아가 2020년 12월 ‘HIV 감염인 진료를 위한 의료기관 길라잡이’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해선 안 되고, 특별한 의학적 사유 없이 감염인을 별도의 장소에서 진료하거나 진료 순서를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에이즈는 더 이상 죽음과 공포의 질병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학의 발달로 치료제를 복용하는 감염인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가능성마저 없어졌다. 그러니 가장 안전해야 할 병원에서 차별이 발생할 정당한 이유란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관련 법이 잠자고 있는 동안 엄지손가락이 절단된 한 감염인이 20여개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요양병원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은 감염인들의 경험들도 계속 들리고 있다. 이 법이 시급히 통과되어야 할 이유다.

이 같은 법안이 발의될 수 있었던 데는 2017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의료 차별 개선을 위한 정책권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를 움직인 것은 윤가브리엘, 손문수와 같은 감염인 당사자들이었다. 특수장갑이 없다고 거부당하고, 가림막이 없다고 거부당하고, 진료 의자에 김장비닐을 뒤집어씌워놓고, 수술 시간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요양병원에서 입원을 거부당했던 경험 등을 ‘차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권고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참고 견뎌라”, “뭐 그 정도 문제를 가지고 그러냐”와 같은 태도로 차별의 경험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그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국회가 발의된 법안조차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 보니 한달 동안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국민청원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가진 긍정적 효과가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윤가브리엘, 손문수처럼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더 많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는 인권의 가치가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의 저항과 말하기를 통해 지켜져왔음을 잊지 말자. 아직 차별의 경험을 말하지 못하고 있을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마음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꿈을 다시 품어본다. 국민동의 청원은 시작일 뿐, 이제 국회가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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