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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단독] 광주 건물 해체계획서 '셀프검토' 뒤 적합판정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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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착기 기사 “건물 부수다 토사 무너져”

중앙일보

10일 오후 17명 사상자 낸 광주 재건축 건물 붕괴사고 현장에서 합동 감식이 이뤄지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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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한 해체계획서에 동일인 ‘셀프 검증’



지난 9일 광주광역시에서 붕괴 사고가 난 건물의 해체계획이 부실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계획서를 작성한 건축사와 이를 검증한 인물이 동일인인 것으로 파악됐다.

관할 지자체인 광주 동구청은 문제의 해체계획서가 ‘셀프 검증’을 통해 지난달 10일 안전성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자 보름 뒤 이를 승인했다. 업계에선 “부실한 해체계획을 작성한 건축사가 자신의 계획서에 ‘문제가 없다’는 검토 결과까지 내놓아 붕괴사고를 초래했다”며 “셀프 검증을 막을 법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14일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이 확보한 ‘학동 4구역 철거 허가 건물 철거공사 계획’에 따르면 이번에 무너진 건물은 지난달 10일 A 건축사사무소로부터 안전성과 철거 계획이 모두 ‘적합’한 것으로 기재됐다.

이 문서에는 건축사 B씨의 직인이 찍혀있으며, 같은 날 건물 안정성 검토와 해체(철거)계획서를 검토해 적정하다는 결론이 나 있다. 검토서에는 해체공법, 사용장비, 비산먼지 대책, 안전관리, 폐기물 반출 계획 등 7가지 항목 모두 적합한 것으로 기재됐다. 해체계획서 작성자는 명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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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붕괴 사고가 난 건물 등 11개 건물에 대한 해체계획서 검토서와 안전성 검토서에는 A건축사사무소가 적합한 것으로 표시한 뒤 직인을 찍었다. [사진 강은미 국회의원실 자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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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붕괴한 건물의 해체계획서는 A건축사사무소가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지난 11일 브리핑에서 “A건축사사무소가 철거업체로부터 용역을 받아 해체계획서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동구청 역시 전날 “A건축사사무소 측에서 계획서를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동구청 관계자는 “해체계획서 허가 이후엔 감리를 맡은 B건축사사무소가 안전성 검토를 다시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철거 계획과 검토를 동일 인물(업체)이 할 경우 “부실 공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건축물관리법 30조는 해체계획의 검토는 ‘건축사사무소’와 ‘기술사사무소’, 안전진단은 국토안전관리원에 의뢰해야 한다.

최명기 대한민국 산업현장 교수는 “관련법에 따라 건축사가 해체계획 검토를 할 수 있지만, 작성자가 셀프검증을 할 경우 부실한 계획을 거를 장치가 없어지게 된다”며 “붕괴 사고가 난 건물은 해체공사를 계획한 사람이 사전 안전진단을 함께 했다는 얘기인데, 이러면 객관적인 검토가 이뤄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철거 업계 관계자는 “철거 작업 전 계획서가 주먹구구식으로 작성되는 일이 허다하다”며 “해체계획서를 철거업체가 직접 작성하거나, 전문성이 없는 건축사가 대충 검토하고 도장을 찍어주는 일이 빈번하다”고 했다.



해체공법 등 7개 항목 ‘적합’ 건물…한달 뒤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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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철거건물 붕괴사고가 발생한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재개발부지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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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검증을 한 해체계획서는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층별 철거 계획과 장비 투입·동선, 타격 지점 등 중요 요소가 빠져있었다. 당초 부실한 계획서 탓에 현장 작업자가 임의적인 판단으로 철거를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찰은 붕괴 원인 규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굴착기 기사 등 공사관계자와 감리소장을 입건해 수사 중이다. 경찰은 전날 철거작업을 진행한 굴착기 기사로부터 “붕괴 전 굴착기로 건물 내부까지 진입해 작업하던 도중 건물에 쌓은 흙더미가 무너졌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철거업체는 건물 뒤편에 쌓인 토사체 위에 중장비를 올려 건물을 부숴나갔는데 최상층부에 굴착기 팔이 닿질 않자 건물 내부까지 들어가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굴착기 기사는 “철거 도중 비산먼지를 막기 위해 평소 작업보다 많은 양의 물을 뿌렸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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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고현장.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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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착기 기사의 진술대로라면 토사체가 중장비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졌고 일부 철거가 진행된 건물 외벽이 도로로 무너지는 과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은 건물이 인도 쪽으로 무너지지 않게 걸어둔 쇠줄(철제 와이어)이 사고 당일 설치되지 않은 사실도 확인했다. 감리업체 소장은 경찰에서 묵비권을 행사 중인 상황이다.

한편, 경찰은 이번 건물 붕괴 참사가 발생한 재개발사업에 조직폭력배 출신 인사가 관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조직폭력배 관리대상에 올라 있는 C씨는 학동을 주 무대로 활동하면서 재개발사업 등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C씨는 2007년 재개발·재건축 대행업을 하는 D사를 설립한 후 재개발이 이뤄진 학동3구역 등에서 조합이 시공사와 철거업체 등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배후에서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아왔다.

경찰 관계자는 "C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정황을 확인하고 있다"며 "현재까지 특별한 단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지금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종권·김준희·진창일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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