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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시선2035] 21세기 동방예의지국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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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지난 7일 췌장암 투병 중이던 유상철 전(前)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50세, 지난 2019년 10월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지 1년 8개월여 만이었다. 의료계에 따르면 췌장암 4기 환자의 절반이 9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기대 수명이 1년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1년 넘게 버텼고 인천 유나이티드를 강등에서 구하며 그라운드를 지켰다. 그래서 그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국민은 그를 감독보다는 월드컵 영웅으로 기억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2002년 여름은 잊을 수 없다. 지금은 걸레로 많이 쓰이는 빨간 ‘비 더 레즈(Be the Reds)’ 티셔츠가 ‘국민 커플티’ 역할을 하던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은 티셔츠 색깔만큼 강렬했다. 월드컵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에서 유 전 감독의 인생 골이 나왔다. 대표팀은 황선홍의 발리슛으로 선제득점을 올린 후 앞서갔으나 국민은 내심 불안했다. 그 직전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와 첫 경기 때 선제골을 넣었으나 1대3으로 역전당한 기억이 남아서다. 온 국민의 불안을 날린 건 유 전 감독의 중거리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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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유상철 감독의 추모 열기 불똥이 박지성에게 튀었다. 사진은 유 전 감독의 추모영상.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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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추모 열기의 불똥은 엉뚱하게 다른 월드컵 영웅에게 튀었다. “박지성은 왜 조문 안 오냐”는 악플은 급기야 그의 아내인 김민지 전 아나운서의 유튜브에도 쏟아졌다. 박지성 부부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 마음대로 출국할 수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에 오더라도 14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하므로 장례식 일정에 맞출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김 전 아나운서가 해명 글을 올렸다. 그는 “세상엔, 한 인간의 삶 속엔 기사로 나오고 SNS에 올라오는 일 말고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슬픔을 증명하라고요? 조의를 기사로 내서 인증하라고요? 조화의 인증샷을 찍으라고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계시냐.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이번엔 해명에 애도가 아닌 분노만 있다는 비난이 날아왔다. 서민 교수는 김 전 아나운서에게 “그 셀럽(박지성)이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게 돕는 게 셀럽 배우자의 도리라는 점에서, 이번 글은 매우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 유 전 감독에 대한 슬픔은 이해한다. 그러나 개인의 ‘도리’까지 운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감정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타인은 알 수도 없거니와 모든 감정을 대중과 공유할 의무도 없다. 장례식장을 찾아야만 ‘진짜 추모’인 것도 아니다. 추모의 공간이 아닌 개인 계정까지 찾아온 악플러에게 예를 갖춰야만 배우자의 도리를 지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상황에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도리를 다하고, 화를 낼 때조차 도리를 걱정해야 하는 21세기 동방예의지국의 모습이 씁쓸하다.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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