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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매경춘추] 판사와 의사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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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판사 생활을 오래할수록 판사와 의사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첫째, 판사 앞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 진실을 다 알고 오는 반면 의사 앞에 오는 사람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모르고 온다. 재판 당사자(원고, 피고, 증인, 피고인, 피해자)는 이미 경험하여 객관적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판사 혼자 모르는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결국 한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반면에 환자는 자신의 병을 모르는 상태에서 의사를 찾아와 증상을 얘기하고, 의사는 여러 검사를 거쳐 비로소 병명을 알아내 환자에게 알려주고 치료해준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며 치료해주는 의사일수록 더욱 안심이 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판사가 의사처럼 큰소리치며 재판을 진행했다가 혹시라도 사실 인정을 그르치면 낭패다. 판사를 제외한 당사자들은 이미 팩트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긴 쪽은 "판사가 잘 속아주네"라고 비아냥거리고, 진 쪽은 "판사가 순 엉터리네"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판사가 겸손하게 백지 상태에서 최대한 선입관을 자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재판에 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둘째, 의사는 전공 분야별로 전문화돼 있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지만 판사는 모든 분야의 사건을 주어지는 대로 처리해야 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 의사의 진료과목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신경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세분화돼 있고, 큰 병원에는 내과만 해도 다시 호흡기내과, 순환기내과, 소화기내과, 혈액종양내과, 감염내과 등 전공 분야별로 의사가 존재한다. 독감을 진료하던 의사가 다음에는 뇌수술, 그다음에는 백내장수술을 돌아가며 담당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판사는 민사, 형사, 가사, 행정, 특허, 도산, 국제 거래 등 모든 분야 사건을 다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 회생법원처럼 전문법원을 늘리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전문법원인 회생법원은 서울에만 있고, 회생법원 소속 판사도 근무기간은 3년에 불과하므로 그 후엔 전근을 가 다른 분야 사건을 돌아가며 맡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에도 최근 수년간 형사, 민사, 도산재판을 번갈아가면서 담당하고 있다. 조선해양공학적 전문지식이 없으면서도 세월호 형사재판을 하면서 침몰 원인을 규명해야 했고, 건설 관련 지식과 용어가 생소한데도 아파트 하자 소송 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이처럼 판사와 의사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판사는 명의(名醫)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조심스러운 결론이다. 판사는 심판(umpire)자가 되어야지, 스타 플레이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판사는 규칙대로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하고, 플레이어의 반칙에 제재를 가하면서도 경기가 지연되지 않도록 운영의 묘를 살리며, 자신이 없으면 바로 '전문가(비디오 판독)'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그저 최선이다.

[서경환 서울회생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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