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서울대 명예교수 조언 "지금 당장 빚내서라도 4차 산업 투자 나서라"

댓글 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한국의 저성장 탈출 해법을 담은 저서 '한국의 시간'으로 최근 학계에서 파장을 일으킨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31일 서울대 공과대 앞에서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호영기자>


"지난 30여 년간 한국 경제 성장률이 대세 하락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대 정부가 국가 발전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51년간 경제와 공학, 역사학을 넘나들며 '통섭(統攝)의 경지'에 오른 노학자 입은 신랄했다.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의 탈출 해법을 담은 저서 '한국의 시간'으로 최근 학계에서 파장을 일으킨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얘기다.

노무현 정부 초대 정보과학기술 수석보좌관을 지낸 그는 정권마다 과학기술부·산업부 장관 하마평에 올랐지만 후학 양성과 저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국가 발전 처방을 듣기 위해 지난달 31일 서울대 공과대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한국이 추세적 장기 저성장에 빠졌다. 원인이 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한국경제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내린 과잉처방으로 성장 동력을 상실한게 가장 큰 원인이다. 후발국은 외생적 성장(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지원 정책)으로만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는데 신자유주의로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 지금도 성장률이 대세 하락을 지속하고 있다.

- 논란의 여지가 있는 평가다. IMF 체제로 경제 체질이 개선된 부분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국가경제는 두가지 원리로 성장한다. 하나는 국가 개입없이 자유 시장경제가 확대 재생산하는 내생적 성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가 주도해 성장을 촉진하는 외생적 성장이다. 후발국에서 시작해 선진국을 추격한 나라는 하나 같이 내생적 성장과 외생적 성장을 함께 했다. 그런데 IMF의 요구는 외생적 성장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보호무역을 불공정 역으로 간주해 후발국이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외생적 성장에 제약을 가한 것이다.

- 최근 미국 주도 글로벌 탄소감축 계획도 산업을 일궈야 하는 후발국에 대한 성장 '사다리' 차버리기 전략인가.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은 네바다 사막 등에 엄청난 태양광 발전시설을 운영할 수 있다. 독일은 연간 내내 편서풍이 불어 풍력 발전을 상시로 할 수 있다. 또 탄소감축은 선진국의 신재생 발전 기술을 고가에 팔 수 있는 기회다.

우리나라는 신재생에너지를 값싸게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된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만 세계 질서에 역행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게 선진국에 유리하고 어떤게 우리에 유리한가를 잘 따져, 한국에 불리한 것은 최대한 늦추고 유리한 건 앞서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글로벌 탄소감축이나 자유무역주의가 '절대 선'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에서는 명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

▷4차 산업혁명에 성공하는게 선진국을 추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강한 자가 독식하기 전에, 빠른 자가 독식하는 세상이다. 일단 승자가 되면 전리품 규모가 국가 단위를 넘어설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시장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체제도 반영구화할 것이다.

국가채무를 늘려서라도 미래 투자에 나서야 한다. 기술에 투자하면 나중에 빚으로 남지 않고 이윤으로 회수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성공여부는 산업기술에 얼마나 많이 투자할지, 과학 기술자들을 얼마나 많이 양성하고 신산업을 얼마나 많이 육성할지에 달렸다.

그러나 지금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빚을 내서는 안된다. 이는 후손에게 우리의 빚을 떠넘기는 것이다. 특히 경제가 성장하지도 않는데 담세능력 밖에서 이뤄지는 복지는 절대로 안된다. 이는 포퓰리즘이고 후손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매일경제

김태유 교수는 "이제 정부가 먹거리 산업을 지정해서는 안된다"며 "정부는 규제를 혁파해 기업가들이 제각기 잘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호영기자>


- 4차 산업혁명에는 수많은 세부 산업군이 담겨있다. 어느 부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투자해야 하는가.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는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 꼭 거쳐가야 하는 기간산업이 있었다. 철강 산업 없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었고 가전산업 없이 TV 생산을 할 수 없었다. 4차 산업혁명에는 기간산업이라는 게 없다. 기간산업을 꼭 해야 하는 과거 산업혁명이 '북극성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엄청나게 많은 산업이 공존하는 '은하수의 시대'다.

이제 정부가 먹거리 산업을 지정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규제를 혁파해 기업가들이 제각기 잘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하면 된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기업을 직접 지원하지 않아도 벤처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또 대기업으로 얼마든지 스스로 커나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를 위한 정부 혁신이 선행돼야 한다.

- 미래 산업에 대한 국가적 투자를 위해서는 재원이 중요하다.

▷세율을 올리는 것은 단세포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다. 대폭적인 규제 완화로 세금 낼 수 있는 기업을 많이 만들어서 세수를 확대해야 한다.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는데 따른 낙수효과는 분명하다. 기업들이 고용을 늘리거나 성장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키우게 된다.

정부가 기업에 대한 증세 위주 세제 개편에 나서지 말고, 돈 잘 버는 기업을 늘리는 처방을 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해 담세능력이 커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청년실업, 노인빈곤 등 모두 담세능력이 부족해 생긴 문제다.

- 4차 산업혁명으로 무인공장 등이 늘면 일자리가 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 그렇지 않다. 크게 봐야 한다. 생산과정에서 로봇과 인공지능 등으로 일부 고용은 줄겠지만 생산에서 10배, 100배 늘어난 가치가 서비스업 등 고용 증가로 이뤄진다. 인간의 의식주가 상품화하며 오락, 여행 등 여가활동과 의료, 건강증진 등에서도 새로운 직업과 고용이 크게 불어날 것이다. 게다가 노동시간 단축에 따라 1개 직업에 2~3명이 일하는 고용 증가도 예상된다.

- 한국이 가져가야 할 성장의 큰 줄기는 뭔가.

▷한국의 보수는 신자유주의에 빠져 외생적 성장 효과를 모르는 반면 진보는 내생적 성장효과를 모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이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 이제 보수는 외생적 성장을 살리고 진보는 내생적 성장을 살려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은 미국이 가장 앞서있고 유럽과 중국이 맹렬히 뒤따르고 있다. 이들 3대 경제권 공통점은 기업활동에 대한 획기적인 규제완화, 우수인력 육성 역량, 정치적 안보에 기반한 거대한 시장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3가지 조건을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4차 산업혁명이 저절로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이자 무지의 소치이다.

개혁의 방향은 크게 세가지다. 우선 규제완화를 골자로 공직체제를 개편하고, 우수인재가 4차 산업혁명분야로 진출하게 해야 하며, 북극항로를 개척해 거대 시장으로 뻗어갈 수 있는 물류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 개혁의 첫 단추는 규제완화라는 말인데 어떻게 규제를 풀 수 있는가.

▷공직사회 개혁이다. 우리나라에 규제가 많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민간기업에 특정 기간 산업을 떠맡기는 강력한 규제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과거에 규제 잘해서 성공한 공직사회를 이제 규제를 풀어서 성공하는 새로운 공직사회로 바꿔야 한다.

규제가 늘어나는 가장 큰 원인은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 때문이다. 대부분 규제는 좋은 의도에서 시행된다. 그런데 왜 좋은 의도와는 달리 어떤 규제는 나쁜 규제가 되는걸까.

나쁜 규제가 없어지지 않는 원인은 순환 보직제로 인하여 공무원이 전문성 없는 일반관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문성이 부족한 공직자는 업무가 파악될 때까지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규제를 강화하기 마련이다.

규제를 완화하면 사고가 터지고 공직자 신상에 화가 미칠 수 있다. 반면 무조건 규제를 강화하면 비록 십수년후에 국가경쟁력이 상실될지라도 해당 공무원은 그 전까지 무사히 승승장구할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규제를 풀어 자기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골칫거리를 만들려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나쁜 규제의 악순환이다.

- 어떻게 공직을 개혁해야 하는가.

▷순환보직제를 없애고 직무군 제도를 도입해 일반 행정관료를 전문 정책관료로 바꿔야 한다. 지금 공직제도는 아마추어 조기축구회 같다. 오늘은 공격수였다가 내일은 수비수로 뛴다. 소속팀은 바뀌지 않지만 선수 포지션이 바뀐다. 공무원 순환보직과 흡사하다.

반면 프로팀에서는 소속팀이 바뀌더라도 선수 포지션은 잘 바꾸지 않는다. 한번 골키퍼는 계속 골키퍼인 경우가 많다. 이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고,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차이다.

선진국은 동일 직무에서 4~5년 이상 복무하고 국장, 과장직에는 심지어 10~20년씩 재직하는데 우리는 승진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보가 잦아 직무에 숙달될 만 하면 다른 직책으로 이동한다. 평균 실국장 재임기간이 1년 1개월이고 과장급 이상은 1년 3개월에 불과하다. 전문성이 떨어지는게 당연하다.

매일경제

김태유 교수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공직 전문성 제고가 필수적이라며 "정부조직 변화 없이도 범부처적으로 유사한 업무를 묶어 10개 내외의 직무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영기자>


-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해법은 뭔가.

▷공무원이 한 부처 안에서 순환보직한다는 것은 이런저런 경험을 거친 '무능한 만능 공무원'을 양산해내는 것 밖에 안된다. 4차 혁명시대 국가발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밖에 없다.

정부조직 변화 없이도 범부처적으로 유사한 업무를 묶어 10개 내외의 직무군을 만들면 된다. 예컨데 국토·환경을 한 묶음으로 하고 과학·교육·문화, 재정·경제, 사회·복지, 외교·국방, 산업·IT, 일반행정 등 직무군을 신설해 승진과 전보는 같은 직무군에서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하되 부처간 벽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서기관 승진을 전후해 '지휘관형' 정책관료와 '참모형' 전문관료 중에 한 가지 트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정책관료는 승진은 빠른 대신 일정 기간 성과를 못내면 직급정년으로 조기 퇴임해야 한다. 반면 전문관료는 직급이 높이 올라가지는 않지만 정년이 보장되는 식이다.

- 대외적으로 한국 경제가 확장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다품종 소량 맞춤형 생산을 하는 4차 산업혁명은 물동량이 폭발하는 시대다. 그런데 종전 항로는 수용 능력이 이미 다 차버렸다. 한반도를 경유하는 북극항로를 하루빨리 선점해 우리경제의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항로는 2030년경이면 1년 12개월 상시 운항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를 통하면 수에즈운하를 경유하는 종전 적도항로에 비해 유럽으로 가는 길이 5000km 더 가깝고 운송 비용은 25% 절감될 것으로 추산된다. 러시아와 협력해 한국형 북극항로 전용선을 개발하면 경제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4차 혁명시대에는 북극항로가 물류 중심이 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는 북방외교는 구색 맞추기 수준에 그쳤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는 연해주와 북극항로 개척을 놓고 러시아와 전천후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He is...

△1951년 부산 △1970년 서울대 공과대 △1981년 미국 콜로라도 대학 경제학 박사 △1987년 서울대 자원·산업공학과 교수 △2003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 △2005년 외교통상부 에너지·자원 직명대사 △2017년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 △현재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명예교수

[김정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