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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일)

“밀양 사람”이 다녔던 그 학교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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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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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5월17일 “독립운동사에 있어 금자탑”
1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설립 100주년’을 맞은 한 학교의 ‘현재적 의미’를 조명하는 학술대회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 게재 시점 나흘 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진행된 이 학술대회에서 주최측은 이 학교를 두고 “독립운동사에 있어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라며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고도 했습니다. 이어 “독립군 기지는 몇 군데 더 있었지만 이 학교만이 1911년 설립 이후 10년 동안 쉼 없이 인재를 키워냈다”며 “독립 운동이 가장 암울했던 1910년대 설립했던 점에서도 의의를 지닌다”고 했습니다. 기사는 또 “설립 100주년인 오는 6월10일 100주년 기념식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라고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신흥무관학교’라는 명칭은 1919년 5월3일부터 사용됐습니다만 그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문을 연 시점이 1911년 6월10일이기 때문에 이때를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일로 보고 있는 것이죠.

1907년 결성된 항일단체 ‘신민회’는 1910년 ‘경술국치’로 당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서간도 지역, 즉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신흥강습소’를 세우게 됩니다.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시작했던 강습소는 세간의 이목을 피하고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이듬해 통화현 합니하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고, 교사 건물 18개동 등의 시설을 갖춥니다. 그 이듬해인 1913년 명칭을 ‘신흥중학교’로 바꾸고, 1914년엔 백두산 서쪽 기슭에 농장으로 위장한 군영 ‘백서농장’을 만들어 대규모 병력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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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17일자 경향신문


초기에는 군사교육과 중학교육을 병행하는 3년제였으나 신흥중학교 시기에는 3년의 중등교육과정과 1년의 군사교육과정이 있는 4년제 본과를 기본으로 1개월부터 6개월까지의 단기 군사특수훈련반 과정이 병행되는 체제로 운영됐습니다. 그러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망명한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지원이 쇄도하고, 일본 육사 출신의 지정천, 중국 원난 사관학교 출신의 이범석 등 유명 무관들까지 합세하기 시작하면서 신흥중학교는 ‘신흥무관학교’로 재탄생하게 되는데요. 1919년 본교를 유하현 고산자가로 이전하며 서너곳의 분교를 운영하게 됐고, 중학교육 과정을 폐지하고 군사교육 과정에 주력하게 됩니다.

또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핵심 지휘관으로 파견되는 등 그 위상도 높아져 갔습니다. 그러나 높아진 명성만큼 일제의 견제도 본격화됐는데요. 특히 1920년 6월 봉오통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일제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만주의 군벌들은 만주 지역의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학살하거나 양민들을 내쫓는 등 탄압을 본격화합니다. 결국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가을, 폐교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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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지역의 1919년 3·1운동의 열기로 독립군 인재들을 배양하기위해 지어졌던 신흥무관학교 본부의 터 고산자 지역.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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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5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추산되는 이 학교 출신들은 이후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됩니다. 서간도 지역의 ‘서로군정서’는 물론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또 지정천은 폐교와 동시에 학생 300명을 이끌고 홍범도 장군의 부대에 합류했고, 청산리 대첩에 참여해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이후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초대사령관이 됐죠,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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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 이석영 선생. 국가보훈처


그러나 이 학교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비극의 전형이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당시 필요한 자금 중 상당부분은 당대 최고의 자산가 중 한명이었던 영석 이석영 선생이 댔습니다. 그의 재산은 당시 쌀 3만섬 규모, 현재가치로는 최소 600억원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주권을 잃자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지역 한인자치단체 경학사 등의 설립자금으로 댔습니다. 그리고 다섯분의 형님과 동생 등 가족 40여명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습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그는 1934년 중국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두부 비지로 끼니를 연명하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아들도 타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20대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형이자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도 ‘일주일에 세끼도 못 먹는’ 곤궁함 속에 독립운동을 하다 1932년 모진 고문을 당해 순국했습니다.

여섯 형제 중 해방 후 고국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던 건 다섯째 이시영 선생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 근대사의 가장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보여준 가풍을 이어갔습니다.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이 됐지만 한국전쟁 중 부정부패로 수많은 군인들이 굶어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해 사임했고,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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